공포특급 - [유일한] 어느날 갑자기 1권 - 6. 먹는 자와 먹히는 자 2부
먹는자와 먹히는자 2부
<아주사 요꼬의 기록>
1.
도대체 내가 어떻게 된 것일까?
시간이 얼마나 지나갔는지 기억도 없다.
이틀, 사흘, 아니면 열흘 .
생각하기도 싫다.
내가 보고 겪은 것을 그대로 기록한다는 사
실조차도 두렵다.
하지만 난 뭔가를 해야 한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
내가 쓴 글이 다른 사람에게 발견되었을 때
나는 어떻게 돼 있을까? 아마도 그 부랑자처
럼 죽어 있으리라.
아, 두렵다! 살고 싶다!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걸 알았다면 좀더 잘
살 것을 . 하고 싶은 여행도 실컷 하고, 먹고
싶은 음식도 배 터지게 먹어 볼 것을 .
어머니, 무서워요! 저에게 용기를 주세요.
2.
내 이름은 아주사 요꼬다. 나이는 스물여섯
이고 직업은 미용사다. 어머니는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아버지와 남동생은 오사카에 살
고 있다. 나는 지바현에서 혼자서 생활하고 있다.
내가 잡혀 온 날은 수요일이었다. 그 날은
나를 찾는 단골손님이 많았던 날이었다. 잠시
의 쉴 틈도 없이 하루종일 수다쟁이 아줌마들
의 넋두리를 들어 주면서 머리를 만져야 했다.
오후 다섯시가 조금 넘어서 퇴근하는데 평
범하게 보이는 농부가 역으로 가는 길을 물어
보았다. 나는 그에게 여러 번 가르쳐 주었지만
그는 초행인지 잘 못 알아 들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이고 마침 그쪽으로 가는 길이고 해서
그 농부의 트럭에 올라탔다.
그가 뭔가로 내 입을 막았고 나는 이내 의식
을 잃었다. 의식을 되찾으니 낯선 지하실이었
다. 그 농부가 내 핸드백을 뒤지고 있었다. 나
는 그때까지만 해도 단순 강도인 줄 알았다.
돈만 빼내 가면 나를 내 보내 줄 거라는 기대
를 품고 있었다.
그 농부는 내가 지켜보고 있는데 태연하게
핸드백을 뒤졌다. 그런데 지갑 속의 돈은 건들
지도 않고 수첩과 신분증만 들여다보고는 다
시 핸드백 속에 넣었다.
난 그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들어 줄 요량
으로 원하는 게 뭐냐고 물었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손은 등 뒤로 해서 기둥에 묶여 있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져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내는 소리를 들었는지 그가 나를 돌아
보았다. 붉은 기운이 가득 찬 소름끼치는 눈빛
이었다. 나는 너무도 두려워 눈을 질끈 감았
다. 소리내어 울고 싶었지만 그것도 용이하지
않았다.
농부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않은 채 계단을
올라갔다. 그는 지하실을 나가면서 스위치를
내렸다. 일순간 어둠이 내렸고 묵중한 철대문
이 닫혔다. 자물쇠 채워지는 소리가 나더니 발
자국 소리가 멀어져 갔다.
나는 참고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울음소
리가 목구멍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얼마나 울
었을까?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쥐들인 모양이었다. 쥐들은 멀리서 놀다가 내
가 움직이지 못하는 걸 눈치챘는지 조금씩 가
까이 다가왔다. 한 시간 가량 지나자 쥐들은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지하실 안을 뛰어다
녔다.
어둠이 눈에 익자 사방을 둘러보았다. 꾀꾀
한 나무 냄새와 쇠냄새가 나는 걸 보니 농기구
를 넣어 두는 창고인 모양이었다.
전신을 무겁게 짓누르는 공포를 이기기 위
해서 나는 가급적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렸다.
쥐새끼들이 나에게 달려들거나, 뱀이라도 나
타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을 안고서 .
새벽의 부윰한 햇살이 지하실로 스며들었을
때 나는 비로소 안도감을 느꼈다. 아, 살았구
나 하는 .
하지만 그건 서곡에 불과했다. 내가 그때 느
꼈던 공포감은 공포가 아니라 낭만에 가까웠
다. 난 오늘에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3.
얼마나 시간이 지나갔는지 기억은 안 나지
만, 심한 허기에 정신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
기 힘들 정도의 극심한 배고품이 밀려 왔다.
움직일 수 없는 고통과 앞으로 어떻게 될지
전혀 짐작할 수 없는 두려움 속에서 찾아온 허
기는 극도의 절망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했
다. 너무도 배가 고파서 울다 자고 울다 자고
를 반복하고 있는데 갑자기 지하실 문이 열리
고 불이 켜졌다.
그 농부가 들어섰다. 마흔 살쯤 되어 보이는
부랑자를 부축한 채 .
나는 뭔가 새로운 일이 벌어진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너무도 배가 고팠다. 먹
을 걸 달라고 말하고 싶은데 재갈이 물려 있어
눈빛으로 애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농부가 나를 돌아보았고 나는 음식을 달라
고 전신으로 애원했다. 그는 나의 애원을 모른
척하고 부랑자를 지하실에 팽개쳐 놓은 채 밖
으로 나갔다. 불도 끄지 않은 채. 문도 잠그지
기 않은 채.
도망갈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나는 발
아래 엎어져 있는 사내를 깨우기 위해서 발을
뻗어 보았다. 발이 닿을랑 말랑 했다. 몸을 길
게 뻗으니 발이 사내의 몸에 닿았다. 손목이
쓰린 걸 무릅쓰고 부랑자를 깨우기 위해서 안
간힘을 썼다. 발로 툭툭 차 보았으나 술에 만
취했는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시간은 흘러가
고 속이 바짝바짝 탔다.
그러는 사이에 다시 그 농부, 아니 미친 놈이
들어왔다. 그 미친 놈은 다시 사내를 들쳐업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모처럼의 탈출 기회를 놓
친 것을 애석해하고 있는데 갑자기 비명소리
가 들려 왔다. 심장을 쥐어짜는 듯한 비명이
밤공기를 길게 찢었다. 뭔가로 내리치는 듯한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이내 정적이 찾아왔지만 나는 좀전에 보았던
그 부랑자가 죽었다는 걸 직감했다. 그 미친
놈의 손에.
이내 뭔가를 내리치는 듯한 도끼 소리와 뭔
가를 써는 듯한 기분나쁜 소리가 한동안 이어졌
다. 귀를 틀어막고 싶었지만 그럴 수도 없었다.
다음은 내 차례야! 저 소리가 끝나면.
극심한 공포가 나의 전신을 에워쌌다. 내가
살아온 날들이 빠른 속도로 지나쳐 갔다. 때론
즐겁고 때론 고통스러웠지만 돌아보면 한결같
이 소중한 날들이.
내가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는 사이에 이 괴
상한 소리는 끝나 있었다. 금방이라도 철문이
열리고 그 미친놈이 들어설 것만 같아 가슴 졸
이고 있는데 놈은 들어오지 않았다.
어디선가 쥐울음소리가 났다. 쥐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걸 보니 아직 살아 있구나 하는
것이 실감났다. 무섭던 차에 쥐라도 보니 살
것 같았다.
4.
공포의 밤이 지나고 다시 아침이 왔다. 새들
의 지저귐 속에서 아침이 밝아오고 있었다.
배고픔에도 지쳐 기진해 있는데 놈이 들어
왔다. 손에 주먹밥과 물을 들고서. 난 너무 배
고파서 헛것을 보고 있는 거라고 여겼다. 아니
면 꿈을 꾸고 있던지.
놈이 손을 풀어 주고 재갈을 끌러 주자 비로
소 현실감이 들었다. 나는 정신없이 주먹밥을
먹었다. 목이 메여 물을 먹으려는데 놈이 물통
을 들어 내게 내밀었다. 나는 놈이 나를 지켜
보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놈은
야릇한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마치 내 알
몸을 감상하는 듯한.
나는 수치감을 느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나는 놈에게 집으로 돌려
보내 달라고 애원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놈은
내가 하려는 말을 눈치챘는지 스르르 일어났
다. 무표정한 얼굴로 아니 애써 분노를 누르
는 듯한 차가운 얼굴로.
놈은 나를 다시 기둥에 묶어놓지 않고 그대
로 밖으로 나갔다. 재갈도 물리지 않은 채. 나
는 놈이 돌아올까봐 꼼짝 않고 있다가 철문이
닫힌 뒤 몸을 움직였다.
나는 놈이 나간 뒤 지하실 안을 계속해서 서
성였다. 예전에는 몰랐지만 이 정도라도 몸을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 한없이 반가웠다. 이
제는 자유의 참뜻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5.
오늘은 그 미친 놈이 담요와 이불을 가져 왔
다. 그리고 어디서 구했는지 헌옷도 한보따리
가져 왔다. 나는 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았다.
나는 오늘 놈을 유심히 살폈다. 놈이 나의
생명을 쥐고 있기에.
나이는 대략 40대 안팎으로 보인다. 얼굴에
는 어떤 고집 같은 것이 어려 있는데 어떤 때
는 잔악무도해 보이다가도 어떤 때는 더없이
순박해 보인다.
눈은 약간 사팔인데 가끔씩 괴기한 빛을 뿜
어낸다. 키는 170정도로 보이며 전체적으로
풍기는 분위기는 음침하다.
머리카락은 오랫동안 손보지 않은 듯 마구
헝클어져 있으며 옷은 멜빵이 달린 청바지를
자주 입는 편이다.
내가 갇혀 있는 지하실은 10평 정도다. 한쪽
에 오래 전부터 사용하지 않아 녹이 슨 농기구
와 여러 가지 연장들이 붉은 녹을 뒤집어쓴 채
방치되어 있다.
계단 밑으로 수도꼭지가 있고 배수구가 놓
여 있다. 하지만 물이 나오지는 않는다. 나는
놈에게 물을 쓸 수 있도록 여러 번 간청했지만
놈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외부와의 통로는 계단 위에 놓여 있는 철문
이 전부다. 놈이 없는 틈에 철문을 밀어보았지
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천장은 4미터 가량 되는데 벽 상단에 가로
세로 30센티미터 가량의 환풍기가 놓여 있고
그 옆에 가로 40센티 세로 50센티 가량의 창
문이 있다. 창문에는 철장이 가로 막혀 있어
설사 사다리가 있다 해도 탈출을 불가능하다.
아침에 새소리만 들릴 뿐 인기척도 들을 수
없고, 자동차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로 봐서는
인적이 드문 마을이나 산 속 별장 같다. 그 미
친놈이 개를 키우는지 개 짓는 소리는 아주 가
까운 곳에서 들린다. 울음소리를 들으니 한두
마리가 아닌 십여 마리도 넘는 것 같다.
지하실은 겨울인데도 따뜻한 편이다. 나는
언제나 이곳에서 나가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다. 살아서 나가게 될지, 죽어
서 쥐도 새도 모르게 이 세상에서 사라질지.
하지만 지금은 놈의 기분을 맞춰 주는 것이
급선무다. 내가 살아나갈 수 있는 길은 그 길
뿐이다. 용기를 내자!
그는 오늘도 주먹밥 일곱 개를 가지고 왔다.
내가 고맙다고 했지만 그는 못 들은 척하고 계
단 밑으로 걸어가더니 수도꼭지를 틀었다. 놀
430
랍게도 물이 쏟아졌다.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최대한으로 우아한
미소를 띄우며 그의 친절에 감사를 표했다. 그
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밖으로 나가더니 동그
란 양철통을 들고 왔다. 휴지와 함께.
양철통의 용도를 비로소 알 것 같았다. 예상
외로 세심한 데가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
었다.
나는 그가 나간 뒤 알몸으로 목욕을 했다.
참으로 오랜 만에 하는 목욕이었다. 뜨거운 물
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하더라도 비누가 없는
것이 조금은 아쉬웠다. 한참 목욕을 하고 있는
데 창틀에서 뭔가가 아른거렸다. 슬쩍 훔쳐보
니 놈이었다.
처음엔 깜짝 놀랐으나 나는 그의 비위를 거
슬리게 될까봐 태연하게 목욕을 했다. 아니,
도리어 그가 내 육체를 잘 볼 수 있도록 그에
게 몸을 돌리다시피 하고 몸을 씻었다.
한참 목욕을 하다 보니 문득, 사형 집행 전
에 사형수에게 친절을 베풀 듯이 마지막 친절
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목욕을 하고 앉아 있었다. 그가 나를
성적 대상으로 원한다면 기꺼이 바치리라는
생각을 하고. 생존을 위해서.
7.
놈은 고자임이 분명하다. 오늘 놈이 매트리
스를 가지고 왔다. 나는 그가 나에게 관심은
있는데 용기가 없어서 시도를 못하는 거라고
판단하고 그를 슬며시 유혹했다. 가슴을 슬쩍
드러낸 채.
하지만 놈은 성적 욕구를 못 느끼는지 여전
히 무표정할 뿐이었다. 나는 그가 갖고 온 매
트리스에 큰대 자로 누워서 오늘 밤을 같이 보
내자고 은근히 유혹했지만 그의 반응은 차가
웠다.
모처럼의 나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놈이 정말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훔쳐보는 것만으로 성적 만족을 느끼
는 성도착증 환자일까?
8.
아버지가 보고 싶다. 사들고 간 정종을 반주
로 드시라고 따라 주면은 더없이 좋아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선하다.
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는지 모르겠
다. 내가 실종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 찾는다
고 학업마저 포기한 거나 아닌지.
히데오 상은 뭘하고 있을까?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그의 청혼을 받아들
일 걸. 그는 내가 싫어서 오사카로 내려간 줄
알겠지.
9.
손톱하고 발톱이 자라나고 있다.
보기엔 흉해도 흉기로 쓰기엔 적당하다.
하지만 결정적인 흉기로 쓸 수 없음이 애석
하다.
10.
너무 외롭다.
너무 괴롭다.
너무 무섭다.
그는 나를 언제까지 이렇게 붙잡아 둘 것인가?
마치 개를 사육하듯이.
요즘은 내가 한 마리 개처럼 느껴진다.
먹고, 자고, 싸고.
11.
그 놈은 매일 주먹밥 7개를 가져올 때를 제
외하곤 일체 나타나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악을 쓰고 말을 붙여도 일절 반
응이 없다. 놈이 나를 납치할 때 길만 물어보
지 않았더라면 나는 오래 전에 놈을 벙어리에
귀머거리라고 생각했으리라.
놈이 말이 없으니 더 무섭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으니 답답하다.
놈은 오늘도 창가에서 나를 훔쳐보았다. 나
는 그가 볼 때나 안 볼 때나 언제나 그의 시선
을 느낀다.
그가 나에게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12.
자살은 쉽다.
머리보다 행동이 앞서는 사람에게는.
자살은 어렵다.
머리속에 잡념이 가득 차 있는 인간에게는.
죽으려 했느나 한시도 잡념이 나를 가만 놔
두지 않았다.
아, 살고 싶다!
다시 한 번.
13.
오늘은 한 시간 가량 밖에서 소름끼치는 소
리가 이어졌다. 전기톱이 돌아가는 소리와 도
끼질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놈은 사람을 죽이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
부랑자처럼.
아, 내 차례는 언제인가?
14.
매일 주먹밥만 가져 오던 그 놈이 오늘은 알
수 없는 고기가 떠 있는 고깃국을 가져 왔다.
오랜 만에 먹는 고기라 그런지 매우 맛있었
다. 놈은 내가 국물까지 다 먹고 나자 야릇한
미소를 띄웠다. 갑자기 소름이 돌았다.
도끼질 소리와 전기톱 소리가 귀청을 울렸
다. 설마 그럴 리는 없지만 웬지 못 먹을 걸 먹
은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양철통에다 오바이
트를 하고 싶은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하루 종일 기분이 찜짬했다.
15.
그 놈은 악마다!
인간이라면 도저히 이럴 수 없다. 무서워 죽
겠다. 지금 내 옆에는 팔이 잘린 젊은이가 앓
고 있다. 놈이 도끼로 자른 것이다.
보기에도 흉측한 모습이었다. 나는 내키지
않았지만 엉성하게 감겨 있는 붕대를 풀렀다.
그리곤 다시 감았다. 피가 팔뚝에서 뚝툭 떨어
졌다.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핏방울이 더 이상
흘러내리지 않도록 몇 번이고 헝겊으로 동여
맸다.
남자는 신열에 들떠서 뭐라고 헛소리를 계
속했다. 어머니를 부르는 것 같았다. 나는 가
엾은 사내의 머리를 내 무릎 위에 올렸다. 나
이는 스물 일고여덟 정도되어 보였다. 준수하
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나는 히데오 상을 생각
하며 사내를 밤새 간호했다.
새벽녘에 남자가 깜짝 놀라며 일어났다. 나
는 놀라는 그는 안정시키기 위해서 거짓말을
했다. 걱정하지 말라면서. 아무도 당신을 해치
지 않을 거라면서.
그러자 남자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소리쳤다.
“흐흑! 도끼로 내 팔을 잘랐어요. 내 눈앞에
서 나는 봤어 개 개들이 먹는 걸 내 팔을 놈은
인간이 아녜요!”
무슨 말인지 언뜻 감이 오지 않았다. 그가
몇 차례 같은 말을 되풀이했을 때 나는 비로소
그 뜻을 알 수 있었다.
전신에 전율이 일었다. 나는 너무도 두려워
그를 꼭 껴안았다. 그는 갓난아기처럼 내 젖가
슴에 얼굴을 파묻고 오열했다.
나는 비로소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놈을 죽
여야 내가 산다는 것을.
16.
애석하게도 기회를 놓쳤다.
악마를 죽일 수 있는.
나는 그 놈을 죽이기 위해서 새벽부터 부러
진 마포자루를 예리하게 갈았다. 있는 힘을 다
해서.
그리곤 문 옆에 숨어서 놈을 기다렸다. 놈은
아무 것도 모른 채 지하실 안으로 들어섰다. 나
는 그 순간 나무 꼬챙이로 놈의 옆구리를 힘껏
찔렀다. 나무 조각은 분명 깊숙히 박혔는데 놈
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물러 서!”
화가 났는지 엽총을 겨누며 거칠게 명령했
다. 정말로 방아쇠를 당길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들어 뒷걸음질 쳤다. 놈은 옆구리에 박힌
나무 꼬챙이를 마치 사과에 박힌 요지를 빼내
듯이 가볍게 뽑아 바닥으로 던졌다. 그리곤 아
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젊은이를 들쳐 업고 나
갔다.
이어서 젊은이의 처절한 비명이 이어졌다.
나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은 뒤 두 귀를 틀어막았
다. 놈의 목을 찌르지 못한 것을 후회하면서.
17.
엄마가 꿈 속에서 나타나 손을 꼭 잡았다.
나는 엄마를 따라서 안개 속을 걸어갔다. 주변
을 두리번거리는 사이에 어머니의 손을 놓치
고 말았다. 어머니가 안개 저편에서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셨다.
잠에서 깨어나니 아쉽고 허전했다. 나를 구
하려 오셨는데.
18.
아버지가 보고 싶어 하루종일 아버지를 생
각했더니 아버지가 보였다. 나는 아버지와 팔
짱을 끼고 벚꽃나무가 늘어선 공원을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새하얀 벚꽃이 눈처럼 휘날
렸다.
갑자기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옆
이 허전해 보니 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피가
끈적거려서 받아 보니 비가 아니라 핏물이었다.
19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눈이 있다.
파란 눈.
까만 눈.
노란 눈.
갈색 눈.
그리고 빨간 눈.
빨간 눈이 나를 내려다본다.
세상의 피란 피는 모조리 빨아들인 듯한 시
뻘건 눈동자가.
아, 숨이 막힌다.
아주사 요꼬의 기록은 여기서 끝나 있었다.
그 뒤에도 뭔가 써 있었지만 너무도 빨리 휘갈
겨 써서 도저히 알아볼 수 없었다. 수첩를 넘
기다 보니 윤석이 끼워 놓은 메모지가 보였다.
메모지는 모두 석 장이었는데 가운데 종이는
일본어로 쓰여진 컴퓨터 용지였다. 나는 첫장
부터 순서대로 읽어 나갔다.
구출 당시의 아주사 요꼬는 식물인간 수준
이었어. 의사의 소견에 의하면 모든 지각 능력
은 멈춰 있거나 퇴보해 있고, 소화 기관만이
정상인보다 더 왕성했다는 거야.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막혔던 말문
도 트이고 지각 능력도 깨어났지만 그녀가 지
하실에서 겪었던 일들만은 전혀 기억을 못하
고 있대. 담당 주치의의 말로는 그녀의 잠재
의식이 그 끔찍했던 기억을 거부하고 있기 때
문이래.
경찰은 마쓰다 이외에 공범이 있었느냐 하
는 것을 캐야 하는데 요꼬가 일체 기억을 못
하니 답답했던 거야. 최소한 마쓰다의 죽음에
관련된 의혹이라도 풀어야겠는데 말야. 그러
다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최면술 전문
가야.
최면술을 걸어서 잠재 의식 속에 숨어 있는
기억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거지. 뒷장의 쪽지
는 그때의 기록을 경찰에서 녹음한 것을 심령
학회에서 따로 기록해 놓은 거야.
..................생략..................
최면술사 : 자 요꼬 양은 지금 지하실에 있
습니다. 무엇을 보고 있나요?
요 꼬 : (망설이다가)처, 철문이요.
최면술사 : 누가 들어오나요?
요 꼬 : (겁에 질려 고개를 끄덕인다.)
최면술사 : 마쓰다 씨, 아니 요꼬 양을 잡아
온 바로 그 자인가요?
요 꼬 : 마, 맞아요!
최면술사 : 그의 손에 뭐가 들려 있죠?
요 꼬 : 무, 무기요! 한 손엔 엽총이 다른
한 손에 도끼가 들려 있어요.
최면술사 : 그가 당신을 해치려 하나요?
요 꼬 : 아, 아녜요! 그가 고함을 지르고
있어요! 나보고 빨리 여기서 나가라고
최면술사 : 그 사람 이외에 누가 더 있나요?
요 꼬 : 모르겠어요! 그도 잔뜩 겁에 질려
있어요!
최면술사 : 그래서 지하실 밖으로 나갔나요?
요 꼬 : 아, 아녜요! 무서워서 꼼짝도 할
수 없어요! 그런데 그가 자꾸만 나가라고 재촉
해요. 모든 게 끝났다면서. 아악! 나, 나타났어
요?
최면술사 : 누가 나타난 거죠? 어떻게 생겼
나요?
요 꼬 : 누, 눈이에요! 그 놈이 쳐다보고
있어요!
최면술사 : 그 놈이라뇨? 당신을 납치한 그
사람인가요?
요 꼬 : 아니에요! 무, 무서워요!
최면술사 : 진정해요. 그럼 당신을 쳐다보고 있
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처음 보는 얼굴인가요?
요 꼬 : 얼, 얼굴은 보이지 않아 아악! 소
름 끼치는 눈빛이에요! 그도 그 놈을 보았어
요. 갑자기 그가 지하실을 뛰쳐 나갔어요.
최면술사 : 그럼 당신은 지금 누구와 있죠?
요 꼬 : 호, 혼자 있어요! 핏빛 눈도 사라
졌어요.
최면술사 : 지하실 문은 열려 있나요?
요 꼬 : 네.
최면술사 : 새로운 것이 보이나요?
요 꼬 : 아니요! 총소리가 들렸어요. 그가
당했나 봐요.
최면술사 : 그가 당하다뇨? 누구한테요?
요 꼬 : 무, 무서워요! 노, 놈이 다가오고
있어요. 아악! 구해 주세요! 놈이 점점 지하실
로 다가와요! 절 죽이려나 봐요! 아, 안 돼요!
최면술사 : 진정해요, 진정. 간호원! 여기 진
정제를.
앞 장의 기록은 일본 최고의 최면술사가 처
음이자 마지막으로 요꼬에게 최면술을 걸어서
알아낸 거야. 이 날 이후로 요꼬는 최면술 자
체를 거부해서 더 이상 새로운 사실을 알아낼
수가 없었어.
요꼬는 정신병원에서 8개월 간 치료를 받았
어. 그 후 퇴원을 해서 두 달 남짓 통원 치료를
받은 뒤 정상인으로 돌아갔어. 요꼬가 지하실
에서 지냈던 140여일이란 기간은 그녀의 기억
속에서 비워진 채로.
정신과 의사들은 그 기간에 자신은 어디 있
었느냐고 묻는 요꼬에게 교통사고를 당해서
정신과에서 치료를 받았노라고 대답을 해 줬
지. 그래서 그녀는 조금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믿으며 퇴원했대.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어. 지
난달, 그러니까 요꼬가 직장으로 복귀한 지 간
지 석달 만에 요꼬의 단골 손님 한 명이 갑자
기 실종됐어. 그 후로 연달아 동료 미용사와
미용사의 남자친구가 사라졌지.
경찰은 대대적인 수사를 벌인 결과, 미용사
의 몸통은 미용사의 집 여행가방에서, 남자 친
구의 머리는 미용사집 장롱에서 각각 발견되
었어. 경찰은 강력한 용의자로 요꼬를 지목해
서 현재 수사중이야.
나는 내일 경찰 측이 요꼬를 심문하는 자리
에 심령학회 사람들과 함께 참석하기로 했어.
요꼬의 심문이 끝나면 모레는 마쓰다 다까히
로의 개 농장에도 들러 볼 예정이야.
귀국하는 대로 자세한 이야기 들려 줄게. 그
동안 너 나름대로 내가 보내 준 자료를 분석해
서 범인과 범행 동기를 추측해 보렴. 잘 있어
라!
윤석이의 메모까지 다 읽고 나니 창문에 아
침 햇살이 어른거렸다. 시계를 보니 아침 6시
반이었다. 일본어 사전을 뒤져 가면서 긴장해
서 읽은 때문인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침대 위에 몸을 던졌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
았다. 머릿속에 온통 피칠을 해 놓은 것처럼
찜찜하기 그지없었다. 자고 나면 한결 개운해
지리라는 기대를 안고 억지로 잠을 청해 보았다.
올 듯 말 듯 잠이 오지 않았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누웠지만 마찬가지였다. 토막난
필름처럼 머릿속에서 잔혹한 장면들이 두서없
이 떠올랐다가 사라져 갔다. 일그러진 마쓰다
다께히로의 얼굴과 아주사 요꼬의 얼굴이 오
목거울과 볼록거울에 비친 것처럼 잔뜩 일그
러진 채 다가왔다가 멀어져 갔다.
잠든 것도 깨어 있는 것도 아닌 가수면 상태
에서 환각에 시달리다가 깜빡 잠이 들었는데
머리맡에서 무언가가 끊임없이 울었다.
눈을 떠 보니 전화벨이었다. 수화기를 들며
시계를 보았다. 한 시간도 채 자지 않은 것 같
은데 오후 5시 반이었다.
“여보세요? 오빠야? 나야!”
서클 후배 지영이었다.
“야, 신새벽에 웬일이야?”
뒷목이 뻐근하고 뒷골이 빠개질 듯이 아파
왔다.
“해질녘에 웬 신새벽 타령? 오빠, 온종일 집
에 있었어요? 어쩐지 캠퍼스 구석구석을 뒤졌
는데도 보이지 않더라니. 주변 사람들 고생시
키지 말고 삐삐 하나 개비하시라니까!”
“야, 인마! 여자 친구가 있어야 삐삐를 개비
하든지 개를 주든지 하지. 그런데 웬일이야.
네가 날 다 찾고.”
“오빠한테 부탁이 있어서요.”
“부탁? 뭔데?”
“철규 일인데.”
“철규?”
나는 순간, 잠이 순식간에 달아나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어젯밤 술자리에서 풍기던 철
규의 심상치 않은 눈빛이 떠올랐다.
“철규가 왜?”
“철규가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나보고 나
와 달래. 그런데 오빠가 같이 나가 줬으면 해
서.”
“야, 지영아. 철규가 너에게만 하고 싶은 말
이 있나 보지. 그런 장소에 내가 나가 봤자 눈
총뿐이 더 받겠냐?”
“나도 아는데 웬지 둘이 만나는 게 내키지
않아서 그래요. 내일 입대한다고 만나자고 하
니 내가 애인도 아니고.”
“뭐, 철규가 내일 입대해?”
“오빠, 몰랐어요?”
“응! 금시초문인데.”
“걔가 그렇다니까! 아무한테도 말도 안 하고
선 내일 군대 간다고 만나달라고 하니 심적 부
담이 안 가겠어요?”
지영이가 서클에서 남학생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서클 사
람들과도 잘 어울리지도 않던 철규마저 지영
이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 줄은 미처 몰랐던 일
이었다. 그렇다면 더더욱 나로서는 끼어서는
안 될 자리였다.
“네 심정은 이해하겠다면 혼자 나가서 철규
를 만나 줘라. 여자에게는 별 게 아닐지 몰라
도 남자에게 군대가는 일은 보통 큰 문제가 아
니야. 철규가 군대 가기 전에 너에게 긴히 할
말이 있는가 본데 나가 봐.”
“오빠는. 철규가 군대 가기 전에 나에게 할
이야기가 뭐 있겠어요?”
“뭐, 추억을 남기고 싶은 거겠지.”
“혼자서요? 난 그런 추억 남기고 싶지 않은
데. 오빠 그러지 말고 같이 만나요. 철규가 오
빠도 만나 보고 싶지만 시간이 없어서 그냥 간
다고 그랬단 말이에요. 그러니 내가 오빠를 불렀
다고 해서 걔가 눈총 주고 그러진 않을 거예요.”
나는 갖은 변명을 다 대며 몇 번이고 사양했
지만 지영은 끈덕지게 졸라댔다. 결국 나는 지
영의 부탁을 들어 주고 말았다. 철규에게는 미
안한 일이었지만 지영이 나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니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책상 위에 널려 있는 께림칙한 사건의 기록
들을 봉투에 챙겨 넣었다. 책상 서랍에다 넣어
두었지만 그래도 찜찜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불길한 기운이 집안을 날아다닐 것만 같아서
아예 열쇠로 서랍을 잠가 버렸다.
약속 장소인 신촌 문고로 들어가서 시집을
뒤적거리고 있으니 지영이 와서 어깨를 쳤다.
나는 지영과 함께 철규를 만나기로 했다는 호
프집으로 갔다.
철규는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영과
같이 들어서는 것을 보았을 터인데도 철규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 없이 일어나서 허리를 꾸
벅 숙였다. 나는 철규의 힘 없는 손을 잡으며
지영과 괜히 나왔구나 하는 후회를 했다.
“역시 같이 나왔네요. 형, 저 내일 입대해요.”
묘한 여운이 풍기는 어투로 말했다. 철규의
쓸쓸한 미소를 보니 내가 몹쓸 짓을 한 느낌이
들었다. 지영도 나를 데려온 것이 민망한지 서
둘러 변명을 했다.
“야, 내일 입대하면서 아무에게도 안 알리고
가면 어떡하냐? 내 그래서 일한이 오빠하고
같이 나왔다. 아무래도 환송식이 너무 쓸쓸할
것 같아서.”
“잘했어.”
철규가 마시던 잔을 비우며 중얼거렸다.
“인마, 군대 가면 군대간다고 친구들에게 공
포하고, 선배들 찾아다니며 술이나 먹어먹고
할 일이지. 자식아, 오늘 너 못 봤으면 많이 섭
섭할 뻔했다.”
나는 재빨리 철규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주인 아주머니가 잔을 갖다 주자 철규가 술병
을 들었다.
“사실 오늘 제가 지영이를 만나자고 한 것은
군대가기 전에 지영이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거든요. 왜 그런 것 있잖아요. 군대가기
전에 털어놓고 싶은 이야기요.”
무슨 말인지 충분히 이해가 갔다. 철규가 말
을 멈추자 테이블에 어색한 긴장감이 흘렀다.
여기까지 와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그래
서 나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앉아 있었다.
“부담 갖지 마요. 그렇다고 해서 사랑 고백
같은 것은 아니니까. 이제부터 솔직히 말할게.
지영아, 너도 알지? 내가 그 동안 너 좋아했던
것. 그렇다고 부담 갖을 것 없어. 그냥 나의 일
방적인 감정이었으니까. 나 이제는 너 포기했
어. 네가 딴사람 마음에 두고 있는 것 알아. 하
지만 군대 가기 전에 이 말은 너에게 꼭 하고
싶었어. 뭐랄까? 일종의 고해성사라고나 할
까? 난 내 이야기를 들어 줄 성직자로 너를 택
한 거야. 그런데 이렇게 형까지 나왔으니 제가
이야기 하기가 한결 수월해지네요.”
“야, 무슨 이야긴데 그렇게 뜸을 들이냐.”
지영이 철규처럼 단숨에 술잔을 비우며 말
했다. 나는 아무래도 술값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 아예 생맥주로 시켰다.
“제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은 P시라는 지방
의 작은 도시예요. 아버지는 운수업을 비롯해
서 몇 개의 크고 작은 사업을 하셨으니 그 지
방의 유지라 할 수 있죠.”
나는 초대받지 않은 자리에 앉아 덤으로 이
야기를 들었다. 철규는 내일 입대라고 생각하
니 홀가분한지 가슴속에 묵혀 두었던 이야기
를 술술 털어놓았다. 지영과 나는 술잔을 기울
이며 진지하게 철규의 고해성사에 귀를 기울
였다.
나는 외아들로 태어났어요. 뭐 한 가지 부족
한 것이 없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가족들이
얼마나 나를 애지중지했겠어요. 그 때문인지
나는 어려서부터 몸이 허약했죠. 몸에 좋다는
온갖 음식에다 일년 삼백육십오일 보약을 입
에 달고 살았는데도 몸은 비루 먹은 나귀처럼
비실비실했죠.
허약하지만 보약 덕에 그런 대로 하루하루
를 지냈죠.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이 되자, 대
학 입시에 대한 부담감 때문인지 갑자기 체력
이 떨어졌어요. 잠을 자도 몸이 나른하고 조금
만 무리를 해도 코피가 나곤 했으니까요. 당연
히 성적도 떨어졌죠.
집안에서는 난리가 났어요. 부모님은 여기
저기 수소문을 해서 몸에 좋다는 약이란 약은
다 구해 왔지만 한번 떨어지기 시작한 체력은
좀처럼 회복될 줄 몰랐죠.
그러던 어느 날 밤이었어요. 책상에 앉아서
첵을 펼쳐 놓은 채 자고 있는데 아버지와 어머
니가 싸우는 소리가 들려 왔죠. 우리 집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던 희귀한 일이었죠.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우리집은 아주
보수적인 집안이라 여자는 남편 말에 무조건
순종을 해 왔거든요. 어머니는 한 밥상에 앉아
도 밥그릇을 밑에다 내려놓고 드실 정도로 아
주 엄한 집안이었죠.
저는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말대꾸하는 소리
를 그때 처음 들었죠. 저는 내심 무슨 큰일이
났나 보다고 생각했죠.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이런 소리가 들려 왔죠.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요!”
어머니가 소리치자 아버지가 작은 소리로
뭐라고 말했어요. 토막난 말들이 간간히 들려
오긴 했지만 무슨 내용인지 감을 잡을 수 없었
죠. 그러다 방안이 잠잠해졌죠.
나는 피곤해서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날
일어나 보니 간밤에 내가 들은 게 꿈이 아니었
나 생각될 정도로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어요.
아버지는 여전히 집안의 독재자로 군림하면서
어머니에게 명령했고, 어머니는 군소리없이
아버지의 말에 순종했죠.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가는데 아무래도 부모
님이 나 때문에 싸운 것 같아 기분이 영 찜찜
하더라고요. 전 그래서 오늘부터라도 보약에
만 기댈 게 아니라, 방과 후에 운동장을 다섯
바퀴씩 돌고 평행봉도 좀 하고 해서 건강한 몸
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죠.
그때부터 저는 수업이 끝나면 매일같이 운
동장에 가서 달리기도 하고, 줄넘기도 하고 평
행봉도 했죠. 처음에는 말할 수 없이 고단하더
니 몸이 적응을 해 나가는 건지 밥맛도 좋아지
고 기분도 상쾌해지더군요.
하여튼 제가 운동을 시작한 지 사나흘쯤 지
나서였죠. 학교에서 돌아와 보니 시내에서 병
원을 하는 박 원장님이 와 계시더라고요. 아버
지와 절친하신 분이라서 저는 박 원장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방으로 들어갔죠.
“먹으면 괜찮아질 거야.”
과외 수업을 받다가 목이 말라서 나왔더니
박 원장이 아버지에게 그러더군요. 나는 그 당
시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조차 몰랐어요.
저녁 때가 되어서 박 원장님이 돌아가셨죠.
과외 선생님도 돌아가기고 해서 혼자서 한참
공부를 하고 있는데 어머니가 밥상을 따로 차
려 오셨어요. 왜 나만 주느냐고 했더니 두 분
은 이미 식사를 하셨다는 거예요. 그전까지는
그런 일이 한 번도 없었지만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죠.
밥을 먹으려고 숟가락을 드니 전혀 못 보던
국이 한 그릇 놓여 있었어요. 굵기는 새끼손가
락만했는데 마치 양곱창 같았죠. 내가 뭐냐고
어머니에게 물어 보았더니 어머니는 저의 얼
굴을 애써 외면하면서 개곱창 전골이라고 하
시던군요.
저는 전에도 여러 번 개고기를 먹어본 적이
있어 개고기를 무척 좋아하는 편이었죠. 그래
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속으로 개곱창도 먹는
구나 하고 생각했죠.
“개 곱창이 건강에 아주 좋다는구나.”
어머니는 새로운 보약이나 새로운 음식을
내올 때마다 던지곤 하던 말을 잊지 않았죠.
나는‘또 시작이구나’생각하고 그 국을 먹어
봤어요. 맛은 그다지 특별하지 않았어요. 몸에
좋다고 하는데다 어머니가 상머리에서 지켜보
고 있어 다 먹어 치웠어요.
그 후로도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개곱창전
골이 상에 올랐어요. 저는 그때마다 혼자서 식
사를 했는데 그 당시는 조금도 이상하게 생각
하지 않았죠. 하여튼 삼개월이 지나자 그 개곱
창 덕분인지 제가 방과 후에 열심히 운동을 한
때문인지 저는 건강한 몸이 되었어요. 다른 친
구들처럼 하루에 대여섯 시간씩 자고 공부를
해도 끄떡 없었죠.
아마 그 빌어먹을 곱창 때문에 제가 건강해
진 건 아닐 거예요. 제가 하루도 쉬지 않고 꾸
준히 운동했기 때문일 거예요.
하여튼 제 성적이 올라가자 아버지는 무척
흡족해 하셨죠. 저는 대학입시를 치를 때까지
한 달에 한두 번은 그 음식을 꼬박꼬박 먹었어
요. 박 원장님이 여러 차례 저희 집에 찾아오
곤 했지만 저는 워낙 바쁜 때라 크게 개의치
않았죠.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것은 제가 먹던 개
곱창전골이 간이 하나도 안 되어 있는 거였어
요. 어머니는 음식을 잘해서 간을 딱 맞추시는
데 항상 그 국은 맹탕이어서 제가 소금이나 간
장을 넣어서 맞춰야 했죠. 어머니에게 물어 보
면 그 국은 원래 그렇게 해서 먹는 거라며 얼
버무렸어요.
저는 한번은 어머니 표정에서 뭔가 석연찮
음을 느꼈지만 워낙 바쁘던 시절이라 금세 잊
어버렸죠.
마침내 저는 대학에 합격해 서울에서 하숙
을 하기 시작했죠. 부모님은 저를 서울로 보내
놓고 안심이 안 되는지 매일이다시피 하숙집
으로 전화를 걸었죠. 저는 부모님의 그림자에
서 벗어나기 위해, 내성적인 성격을 바꾸기 위
해 서클에 들었어요.
형은 잘 모르겠지만 저 1학년 1학기 때는 정
말 서클 활동 열심히 했어요. 영화도 제일 많
이 보고.
그래서인지 성격도 많이 쾌활해졌죠. 학교
생활에 재미를 붙일 만하니까 방학이 되더군
요. 남들은 배낭여행이다, 어학연수다 해서 집
을 떠날 꿈에 부풀어 있었지만 저는 그 동안
소홀했던 부모님과 함께 지내며 책이나 읽을
생각으로 집으로 내려갔죠.
제기랄! 그때 그냥 배낭여행이나 갔었더라면.
하여튼 간에 제가 집으로 내려가자 부모님
이 매우 반가워하셨죠. 객지에서 생활하느라
제대로 못 먹어서 수척해져 있을 줄 알았던 아
들이 오히려 더 건강하게 돌아왔으니 얼마나
기뻐하셨겠어요.
저는 몸에 좋은 온갖 음식들을 먹으며 시원
한 그늘에서 책을 읽었어요. 그러다 출출하면
어머니가 갖다 놓은 과일을 먹고 졸리면 책을
베고 낮잠을 잤죠. 심심하면 천렵하러 가고.
가히 신선 부럽지 않은 생활을 하면서 시간들
을 흘려 보냈죠.
그러던 어느 날이었어요. 친구들하고 낚시
를 하고 돌아오니 어머니가 부엌에서 음식 준
비를 하느라고 분주히 움직이고 계셨어요. 나
는 무슨 잔치라도 하는구나 하고 가볍게 생각
했죠. 그런데 어머니의 얼굴 표정이 무척 어두
워 보였어요. 제가 어디 아프시냐고 물어 보았
지만 아무 말씀도 안 하시는 거예요.
아버지께 오늘이 무슨 날이냐고 물었더니
오래간만에 친구들을 불러서 약주를 한잔 하
시기로 하셨다는 거예요. 전 어머니 몸이 불편
해 보여서 도와 줄 거 없냐고 부엌으로 들어갔
죠. 그랬더니 어머니는 괜찮으니까 시내에 나
가서 친구들 좀 만나고 놀다오라고 하시더군
요. 전 잡일이나 도와 줄 속셈으로 그냥 집에
남아 있었어요.
이윽고 밤이 되자 아버지 친구분들이 도착
했어요. 다들 전작이 있었는지 술에 취하셔서
오셨더군요. 그 중에는 박 원장도 있었죠. 박
원장은 한 손에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와서 어
머니께 건네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띄웠어
요. 뭔가 옳지 못한 거래를 하는 사람처럼.
“오랫만에 영양 보충을 좀 하겠는데.”
“아무튼 건강식으론 이게 최고라니까!”
“오늘 저녁에 우리 집사람 잠 못 자는 거 아
냐?”
아버지 친구분들은 한마디씩 떠들며 사랑채
로 들어갔어요. 전 어머니를 도와 드리려고 했
지만 어머니가 완강하게 거부하셔서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죠. 모두들 술에 취해서 떠들썩
했는데 시간이 지나자 더욱 소란스러워졌죠.
“여보, 여기 안주 좀 더 가져 와! 술도 몇 병
더 가져 오고!”
아버지 고함소리가 끝없이 이어졌어요. 저
는 배도 출출하고 해서 심부름도 좀 해 주고
배도 채울 겸해서 부엌으로 갔죠.
어머니는 안주를 가지고 사랑채로 가셨는지
술을 사러 가셨는지 부엌에는 아무도 없더라
고요. 저는 뭐 먹을 게 없을까 해서 여기저기
기웃거려 왔죠. 가스렌지 위에 큰 솥이 놓여
있길래 무심코 열어 봤어요. 제가 고등학교 때
먹던 바로 그 개곱창이었어요. 제가 먹던 것보
다 약간 더 맵게 보여서 간을 보려고 숟가락을
넣어 저었어요.
한 숟가락 떠먹으려고 하는데 내용물 중에
는 도저히 개의 부위로 보이지 않는 것이 눈에
띄었어요. 고개를 갸웃거리며 국물을 떠먹어
봤는데 역시 싱겁더라고요.
저는 오랫만에 개 곱창이나 먹어 보려고 국
그릇을 들었죠. 국자를 찾는데 싱크대 위에 박
원장이 가져 온 검은 비닐봉지가 보였어요. 뭐
가 들었길래 그런가 해서 봉지 안을 들여다보
았죠. 피가 잔뜩 묻어 있는 개 곱창하고 아무
리 봐도 무슨 부위인지 짐작할 수 없는 고기가
들어 있었어요. 흉칙해서 봉지를 다시 덮었죠.
돌아서려는데 뭔가 기분이 개운치 않았어
요. 다시 비닐봉지를 열고 보았죠. 옆에
작은 이름표가 매달려 있더라고요. 전 처음에
는 가격표인 줄 알았어요. 개곱창은 얼마나 하
나 들여다보았죠. 피가 묻어서 잘 안 보여 손
가락으로 닦고 읽어 보았죠.
그런데 제기랄!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
었어요.
1994년 7월 14일 13시 37분
김태자 씨 남자아이 순산.
저는 그 꼬리표를 몇 번이고 읽어 보았지만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할 수 없더라고요.
개곱창과 김태자 씨가 남자아이를 순산한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거지?
뭔가 생각날 듯 말 듯했는데 그게 뭔지 구체
적으로 떠오르지가 않았죠.
에라 모르겠다! 밥이나 먹고 나서 생각하자.
저는 국자를 들고 솥 안을 휘휘 저었어요.
꾸불꾸불한 곱창을 보는 순간, 뭔가 둔탁한 것
이 머리를‘쿵!’하고 때리더군요. 저는 한순간
에 깨달았어요. 내가 일 년 넘게 먹었고, 박 원
장이 가져와 아버지와 친구분들이 먹고 있는
것이 개곱창이 아니라 아기의 탯줄과 태반이
라는 것을.
갑자기 세상이 흔들리시 시작했어요. 욕지
기가 치밀어올랐죠. 어떻게 집을 나왔는조차
도 기억할 수 없었어요. 어머니가 뒤에서 다급
하게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저는 집을 뛰쳐
나와 벌판으로 달렸죠.
논두렁에 쪼그리고 앉아서 저는 오바이트를
했어요. 손가락을 입에 넣어 가면서. 솔직히
토해낼 수 있다면 저는 망설이지 않고 위장까
지 토해냈을 거예요.
머릿속에서는‘너는 식인종이야! 식인종!’하
는 소리가 끝없이 메아리쳤어요. 저는 이 소리
들부터 잠재워야겠다고 생각했죠. 정말로 미
칠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구멍가게로 갔어요.
구멍가게에서 주머니에 있던 돈을 모조리 터
니 소주 네 병을 살 수가 있더군요. 전 소주를
들고 죽방으로 갔어요.
“아냐! 난 아냐! 내 자의가 아니었다고.”
나는 울면서 깡술을 들이켰죠. 소주 세 병까
지 마신 것 기억하겠는데 그 다음부턴 기억이
안 나요. 제가 눈을 떠 보니 제 방이었죠. 어머
니가 머리맡에 앉아 한숨을 푹푹 내쉬고 계셨
어요.
제가 일어나자 어머니는 미음을 내 오시더
군요. 제가 아무 말없이 상을 밀어놓자 어머니
가 변명하듯 이렇게 말씀하셨죠.
“하루는 말이다 네 아버지가 어디선가 태
아의 탯줄과 태반이 몸에 좋다는 이야기를 어
디서 듣고 오셨더구나. 서울에 있는 산부인과
에서는 실제로 태반과 탯줄이 비싼 가격에 암
거래 된다는 소문과 함께. 그게 발단이었다.
그냥 흘려 들었으면 그만인 것을, 네 건강이
부실하다 보니 네 아버지는 그냥 흘려 들을 수
없었던 거야.
난 펄쩍 뛰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박했
지. 그런데 아버지는 네가 저러다 병이라도 걸
리면 어떡하려고 하느냐며 도리어 나를 나무
랬지. 대가 끊겨 조상님들께 씻을 수 없는 죄
를 짓기 전에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자는 거
야.
그래 결국, 네 아버지는 친구분인 박 원장님
을 만나 탯줄과 태반을 구해 달라고 부탁하기
에 이른 거야. 박 원장님은 약효에는 반신반의
하면서도 친구의 간절한 부탁이라 뿌리칠 수
가 없었던 거지. 원래 아기가 태어날 때 자른
탯줄과 태반은 한번에 모아서 태우는 게 정상이
야. 그런데 박 원장님이 불법으로 빼내신 거야.
난 정말이지 그걸 만지기가 죽기보다 싫었
어. 하지만 네가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는 말
에 마지 못해 음식으로 만든 거야. 넌 모르겠
지만 너에게 그걸 해 준 뒤부터 나는 고기는 일
절 못 먹겠더라. 자꾸만 그게 생각나서 말야.
한 달만 먹여 보고 약효가 없으면 그만둘 생
각이었는데 놀랍게도 네가 변하더구나. 밥도
한 그릇 너끈히 비우고. 네 아버지도 아버지지
만 나 역시 무척 놀랐단다.
그런데 놀라기는 박 원장님 역시 마찬가지
였나 봐. 네가 변하는 걸 눈으로 지켜보셨으니
까. 네 아버지와 박 원장은 태아와 태반이 훌
륭한 정력제임이 분명하다고 확신하기에 이른
거지.
그래서 두 분은 정력제로 한번 먹어 보기로
하신 거야. 그러다 조금씩 소문이 나고, 사람
들이 한 명씩 끼어들어 무슨 계모임처럼 커진
거지. 한 달에 한 번씩 그걸 먹는.
어제도 그런 날 중의 하루였어. 휴우 . 나는
네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떡하나 하고 늘
조마조마했지. 그런데 결국 이렇게 드러나고
말았구나. 지금은 네 아버지와 내가 무척이나
원망스럽겠지. 하지만 너도 나중에는 알게 될
것이다.부모의 마음을.”
어머니는 이야기를 끝내고는 자리에서 일어
나서 부엌으로 가셨어요. 저에게 눈물을 보이
고 싶지 않았던 거겠죠.
저는 곧바로 짐을 싸서 서울로 올라왔어요.
어머니가 며칠만 더 있다 가라고 붙잡았지만
단 한 시간도 집에서 머물고 싶은 마음이 없었
죠. 그 이후로 저는 1년 넘게 한번도 집에 내려
가지 않았어요. 명절이나 방학때는 물론이고
제사때도 참석하지 않았죠.
그러자 아버지께서 할아버지 제사를 앞두고
서울로 올라오셨더군요. 언제까지 이렇게 살
거냐면서. 저는 그때 군대에 자원을 해서 입영
통지서를 받아놓은 상태였죠. 아버지가 강제
로라도 저를 끌고 갈 태세여서 입영통지서를
보여 드렸죠. 그리곤 이렇게 말했어요.
“군대 가기 전에 박 원장님을 부당의료 행위
자로 고발할지도 모르겠어요. 마치 고기 회식
을 하듯이 탯줄과 태반을 상습적으로 복용한
아버지와 친구분들도요.”
아버지는 무슨 말인가 하려다가 입을 다물
었어요. 한동안 가만히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
나더니 군대 잘 갔다오라고 하시더군요. 그리
곤 표정이 굳어서 하숙집을 나가셨죠.
제가 군대 갔다오면 생각이 어떻게 달라질
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어
요. 아버지는 최소한 두 개의 죄를 저질었어요.
첫째는 아무리 자식의 건강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태아와 탯줄을 먹였으니 인륜을 저버
린 거예요. 인간이 사는 사회에는 인간의 행위
를 규범한 법보다도 더 무서운 게 있어요. 그
게 바로 인륜이에요. 자식을 위해서는 인간으
로써의 규범을 저버려도 된다고 한다면 사회
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어요. 인륜을 저 버
리지 않는 한도내에서 자식을 위해야 했던 건
데 아버지는 그걸 망각하셨던 거지요.
둘째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죄예요.
아버지는 이기적인 발상으로 탯줄과 태반을
정력제로 복용했어요. 아버지는 천륜을 어긴
거예요.
아버지를 죄를 들먹거리는 제 마음은 사실
가볍지 않아요. 시간이 지날수록 제 마음의 무
게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군대에 자원한 건
지도 모르겠어요. 삼 년 동안 군대에서 뒹굴다
보면 뭔가 변하겠죠. 제 의식이 변하든지, 정
력제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우리
사회의 풍토가 변하든지.
철규는 이야기를 얼추 끝냈는지 자조적인
웃음을 띄웠다. 뭐라고 위로를 해야겠는데 나
는 아무런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 동안 철
규의 가슴을 짓눌렀을 고통이 내 가슴에도 와
닿았다.
“형, 제가 전생에 뭔 죄를 졌길래 그런 걸 다
먹어야 했던 걸까요? 사람을 먹는 행위가 죄
인지 모르는 식인종과 타의에 의해서 사람고
기를 먹은 저와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요?”
철규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나는 철규의
손을 꼭 잡아 주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동안 남모를 고민으로 애태웠을 철규에게 좀
더 잘해 주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지영에게 눈물을 내비치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던 철규는 빠르게 눈물을 수습했다.
“지영아, 이야기 들어 줘서 고마워. 형도요.
오랫동안 지고 있던 짐을 풀어놓은 기분이에
요. 형, 저 군대 가서 변해 가지고 올게요.”
“그래! 내가 볼 때는 한시라도 빨리 정신을
환기시키는 게 좋겠다. 뭐든지 집착하는 건 좋
지 않아. 좀더 멀리 떨어져서 볼 필요가 있지.”
나는 철규의 어깨를 다독거려 줬다.
“철규야 이야기 잘 들었어. 훈련소에서 외롭
고 힘들면 편지해. 답장해 줄 테니까.”
지영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 뒤로 우리는 분
위기를 바꾸기 위해서 정치, 경제, 문화를 화
제에 올렸지만 핵심 부분으로 파고들지 못하
고 겉만 맴돌았다.
한동안 말없이 술만 마시다가 철규와 지영,
둘만의 자리를 만들어 주고 싶어서 잠시 자리
를 떴다. 휘황찬란한 네온사인이 어둠을 사르
고 있는 거리를 거닐다가 다시 술집으로 들어
가니 철규와 지영이 일어서려 하고 있었다.
“야, 이차 가자. 내가 끝내 주는 술집 봐
놨어!”
아무 말 없이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게 미안
해서 변명삼아 말했다. 카운터로 가서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오니 지영은 서 있는데 철규는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 거리는데 찻길 건너편
에서 철규가 울음 섞인 고함을 질렀다.
“형, 저 다음에 볼 때는 딴 사람이 되어 있을
거예요. 기대하세요. 지영이도. 이차는 휴가
나와서 얻어먹을게요!”
“철규야!”
내가 도로를 건너가려고 하는데 철규가 절
도 있게 거수경례를 하고는 골목으로 뛰어갔
다. 나는 잡으러 갈 생각도 못하고 멀어져 가
는 철규의 뒷모습만 멍히 바라보았다.
“철규, 힘들었을 텐데. 잘해 줄 걸.”
등 뒤에서 지영이 중얼거렸다.
나는 지영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면서, 정
권을 잡기 위해 국민을 죽이는 독재자와 자신
의 건강을 위해 탯줄과 태반을 먹는 사람과의
차이가 뭘까를 생각해 보았다. 새삼 인간의 탐
욕과 잔혹성에 몸서리가 쳐졌다. 마쓰다 다까
히로의 사건과 철규의 이야기와 실타래처럼
마구 엉켜 머릿속은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람답게 살기가 결코
쉽지만은 않구나! 철규처럼 아주사 요꼬처럼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사람고기를 먹을
수도 있으니.
밤거리를 걷다가 집으로 돌아와 보니 자동
응답기의 불빛이 불쾌하게 깜박거리고 있었
다. 옷을 벗으면서 재생 스위치를 눌렀다. 뜻
하지 않게 윤석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윤석이야. 여긴 공항이야, 나 금방 왔어.
집에 안 붙어 있고, 어디 갔니? 집에 있으면
오늘 보려고 했는데. 일본에서 흥미있는 일이
너무 많았어. 듣고 싶지? 늦어도 좋으니 오피
스텔로 전화해라. 알았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스
웠다. 소포에 윤석이 일주일 뒤쯤 온다고 해서
나는 정말로 윤석이 일주일 뒤에 올 거라고 믿
고 있었다. 소포가 일본에서 한국까지 오는데
걸리는 기간은 전혀 계산해 넣지 않은 채.
시계를 보니 열한시였다.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나는 윤석에게 전화를 하지 않았
다. 오늘은 더 이상 사람이 사람을 먹는 그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다.
침대에 눕자 인간의 형상을 한 헛것들이 허
공을 날아다녔다. 나는 밤 늦게 까지 허상에
시달리다가 가까스로 잠이 들었다.
“형 전화 왔어.”
동생이 흔들어 깨워 눈을 뜨니 아침 열시였
다. 전화를 받아 보니 윤석이었다.
“야, 해가 중천에 떴는데 뭐하냐? 빨리 오피
스텔로 나와라! 얼굴 본 지도 오래돼서 기억에
가물가물하다.”
윤석의 목소리는 활기에 차 있었다. 마쓰다
다까히로 사건의 뒷이야기를 전해 줄 윤석이
한편으론 반가우면서도 끔찍한 이야기를 들을
생각을 하니 한편으론 꺼려졌다.
“차 타고 오기 귀찮아서 그래? 내가 그리 갈까?”
내가 선뜻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고 있자 윤
석이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하지만 호기심은
공포보다 강했다. 나는 윤석과 압구정동의 한
카페에서 12시 반에 만나는데 합의했다.
두 권의 수기를 꺼내 들고 약속한 카페로 갔
다. 윤석은 아직 안 와 있었다. 창가 쪽으로 자
리를 잡은 뒤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소
개팅을 하는 듯한 네 명의 남녀를 비롯해서 쌍
쌍이들 앉아서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유심히 살폈다. 갑자기 나의 시
선은 그들의 입으로 향했다. 커피를 마시는
입, 과자를 먹는 입등이.... 입만 살펴보니까
너무 탐욕스럽게 보이는 것 같았다. 마치 모두
들 인간의 고기를 씹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포크에 찍혀 입 안으로 들어가는 고기를 보
고 있는데 누군가 어깨를 툭 쳤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드니 윤석이었다.나는 형 장레식 이후
처음 본 윤석이의 모습을 찬찬히 살펴 보았다.
그때보다 좀 좋아진 얼굴이었다. 표정도 밝아
보이고. 하긴 그때는 완전히 폐인 이었으니
까...
“마, 뭘 그렇게 넋놓고 보고 있냐? 왜 부럽냐?”
“그래! 저렇게 맛있게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식욕이 부러워 죽겠다.”
“요즘은 집에서 밥도 못 얻어먹고 사냐? 왜
함박스텍이나 하나 시켜 주랴?”
“됐다! 고기는 보기만 해도 질린다.”
내가 손을 젓자 윤석이 무슨 의민지 눈치챘
는지 빙그레 웃었다. 윤석은 전에 만났을 때보
다 얼굴이 좋아 보였다. 표정도 밝아 보였고,
눈동자도 기이할 정도로 빛나고 있었다.
“일본에서 재미가 좋았나 보지?”
“재미? 말도 마라. 덥고, 끈적거려서 아주
혼났다. 일본애들은 기후 때문에 그렇게 독종
이 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기까지 하더라.”
“그래도 쇼핑은 했겠지?”
“쇼핑? 여인네처럼 웬 쇼핑?”
“넌마 그 머나 먼 일본까지 갔으면서 선물도
하나 안 사왔단 말야?”
“아하, 선물!”
심심해서 해 본 소린데 윤석이 의외로 순순
히 받았다.
“선물이야 사 왔지. 펴 봐라!’
윤석이 들고 온 쇼핑백에서 네모다란 선물
꾸러미를 내밀었다.
“야, 네가 웬일이냐!”
“끌러 봐! 일본에서도 구하기 힘든 아주 귀
한 거니까.”
“고맙다야. 친구는 역시 잘 두고 볼 일이라
니까.”
포장지를 벗기자 네모난 상자가 나왔다. 상
자를 열고 꺼내 보니 액자였다. 액자 속에는
풍경 사진이 끼워져 있었다. 다리에 석양이 걸
려 있는데 한 여자가 강물로 뛰어들고 있었다.
거꾸로 떨어져 내리는 여자의 모습과 아름다
운 다리, 저녁 노을이 어울어져 비장한 슬픔
같은 것을 느끼게 했다.
“야, 잘 봐. 보통 사진이 아니거든.”
윤석이 탁자 위에 팔을 괴고 말했다. 나는
다리에 노을이 걸려 있는 사진에다 거꾸로 떨
어지는 여자 사진을 합성한 거라고 간단하게
판단했다. 신기한 것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이
라면 충분히 그런 짓을 하고도 남았기에.
“이 다리 이름이 뭐냐?”
난 여자에서 떨어지는 여자의 얼굴을 내려
다보며 물었다.
“도쿄와 요꼬하마를 잇는 베이 브릿지야.“
“생긴 게 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골든 게이
트 브릿지를 닮았는데.”
“그렇지. 남해대교와 비슷한 현수교니까. 나
도 시간이 없어서 직접 가 보지는 못했는데 무
척 아름답다고 하더라.”
“사진을 보고 있으니 가히 짐작이 간다. 어
느 정도인지.”
사진 속에 강물로 뛰어내리는 여자가 없었
더라면 훨씬 더 편안하게 사진을 감상을 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이 다리가 완공되자, 이 다리에
서 투신 자살하는 사람이 많았대. 특히 여자들
이 많이 투신 자살을 한 거야. 마치 유행병처
럼 번진 모양이야. 보다 못한 당국에서는 여자
혼자서 숙박을 하려고 하면 방을 주지 말라고
다리 주변의 호텔이나 여관에다 지시했지. 그
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은 끝없이 이어진 거야.”
“그래서 이런 합성 사진을 만든 거구나.”
나는 사진 속의 여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
며 말했다.
“합성 사진? 아냐, 그거 진짜 사진이야!”
“뭐? 그럼 이 여자가 정말로 투신하는 거란
말야?”
관광 상품으로 팔아먹기 위해 사진을 합성
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던 나는 깜짝 놀라
고 말았다. 여자의 표정을 들여다보니 긴장미
가 흐르는 게 정말 같기도 했다.
“이 사진은 무명의 사진 작가가 자살 현장을
사진으로 찍으면 돈이 되겠구나 생각하고 일
주일을 기다렸다가 찍은 거야. 그런데 문제는
자살하는 여자가 아니라 여길 봐. 수면 위에
뭐가 튀어 나와 있지?”
윤석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쳐다보았
다. 놀랍게도 수면 위로 팔 같은 것이 나와 있
었다. 두 팔은 마치 떨어지는 여자를 환영한다
는 듯이 여자를 향해 쫙 펴져 있었다. 두 팔과
공포에 질린 여자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갑자
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 사진을 찍은 사진 작가는 특종이다고 생
각하고, 집으로 달려가 사진을 현상했지. 그랬
더니 찍을 때는 몰랐는데 놀랍게도 수면 위로
팔이 치솟아 있는 거야.”
“그 사진 작가는 뜻하지 않은 횡재를 했겠군.”
“아냐, 그 반대야. 결국 이 팔 때문에 신문사
와 일류 잡지사에서는 사진 조작이라며 사진
을 사 주지 않았지. 결국 싸구려 주간지에 헐
값을 받고 게재할 수밖에 없었어. 사진 작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사진 조작을 하지 않았다는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일본 심령학회
에 사진을 보냈지. 이 사진이 바로 그 사진이
야. 일본 심령학회에서는 사진 전문가를 초빙
해서 의견을 주고 받으며 사진 분석에 들어갔
지. 그 결과 사진은 진짜로 판명됐어. 하지만
너무 늦었지.”
“늦다니?”
“그 사진 작가가 죽어 버린 뒤란 거야. 사진
작가는 베이 브릿지에서 투신 자살을 했지. 사
진 속의 여자가 뛰어내린 바로 그 자리에서.”
“자살한 이유가 뭔데?”
“일본 경찰은 사진 작가가 자살할 만한 뚜렷
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대. 유서도 없었고, 가
족들에 의하면 자살하기 직전에 보이는 이상
한 행동도 전혀 없었다는 거야. 참으로 이상한
일이지. 며칠만 기다리면 자신의 결백이 세상
에 공개될 텐데 투신 자살을 하다니.”
윤석은 목이 마른지 컵에 담긴 물을 단숨에
비우고 나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의문은 그것만이 아냐. 사진 작가가
다리 위에서 투신한 시각에 그의 간이 스튜디
오에 원인 모를 불이 난 거야. 필름은 물론이
고 사진까지 모조리 불에 타 버렸대. 잡지사에
서 게재하고 나서 돌려 보내 준 사진까지 모조
리. 이 사진이 한 장 남은 유일한 사진이지. 일
본 심령학회에서 이번 마쓰다 다까히로 사건
에 협조해 줘서 고맙다며 나에게 액자를 끼워
선물한 거야. 잘 보관해. 세월이 흐른 뒤 경매
장에 내다 팔면 큰 돈이 될지도 모르니까.”
윤석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니 사진을 다시
보기가 겁이 났다. 흔치 않은 선물인 것만은
확실하지만 받고 싶은 마음이 싹 달아난 뒤였
다. 이런 사진을 벽에다 걸어 놓고 잠을 잘 생
각을 하니 끔찍하기까지 했다. 나는 액자를 상
자에 넣어 윤석에게 돌려 주었다.
“야, 난 이런 사연이 담긴 선물은 다이아몬
드를 갖다 준다고 해도 싫다. 누구 성수대교에
서 투신하는 꼴 보고 싶어서 그러냐. 성의는
고맙지만 이것 네가 보관해라. 나 같은 범인이
갖고 있을 성질의 것이 아닌 것 같다.”
“짜식! 이게 얼마나 희귀한 사진인데 그러냐.”
“난 평범한 게 좋아. 다음에 선물할 때는 내
취향을 좀 고려해 다오.”
“정 싫다면 할 수 없지. 그건 그렇고 내가 보
내 준 수기는 가지고 나왔지?”
“물론이지!”
나는 재빨리 옆자리에 놓아 두었던 봉투를
테이블에 올려놨다. 악덕고리업자에게 실컷 시
달리다가 마침내 빚을 갚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것 때문에 일본 경찰에서 난리다. 수기
어디 있느냐고.”
윤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봉투에서 노트
와 수첩을 꺼내 확인해 보았다.
“그래서 어떡했냐?”
“뭘 어떡해, 일본 심령학회 회장이 모른다고
잡아뗐지.”
“야, 조사 좀 해 달라고 수기를 맡긴 건데 모
른다니 도대체 그게 말이 되냐?”
“말이 안 되지만 어떡할 거야? 금고 속에다
넣어 놨는데 귀신이 훔쳐 갔는지 사라져 버렸
다고 오리발을 내미는데.”
“일본 경찰애들이 그렇게 허술해?”
“그럼 지들이 어떡하겠냐? 공식적인 루트를
통해서 자료를 건네 준 것도 아니고 비공식적
으로 수사에 협조해 달라고 요청한 건데. 경찰
간부가 와서 난색을 표명하더니 사건이 일단
락되니까 그냥 넘어가더라.”
“일단락 됐어? 어떻게?”
“야, 나도 일단 차나 한잔 마시고 나서 차근
차근 이야기하자.”
윤석은 손을 들어 지나가는 종업원을 불렀
다. 그리곤 오렌지 쥬스를 주문한 뒤 액자와
수기를 쇼핑백에 차곡차곡 넣기 시작했다. 나
는 아주사 요꼬가 어떻게 됐을까 무척 궁금했
지만 급할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창 밖을 보
았다.
따사로운 햇살 속으로 짧은 치마를 입은 젊
은 여자 둘이 까르르 웃으며 지나갔다. 하지만
웃음소리는 유리창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아주사 요꼬도 마쓰다 다까히로에게 납치되
기 전에는 저렇게 밝고 쾌활했을까?
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서로 어깨를 치면서
웃고 떠드는 여자들의 얼굴을 보면서 아주사
요꼬의 웃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려 시도해
보았다. 수첩에서 본 요꼬의 얼굴에다 밝은 웃
음을 달아 주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허사였
다. 요꼬는 웃지 않았다. 아니 결코 웃을 수 없
었다. 내 상상 속에서는.
“이 기록들 다 읽었지?”
윤석의 목소리가 들려 와 나는 그제서야 시
선을 거둬 윤석을 보았다. 그리곤 고개를 끄덕
였다.
“어때? 재밌지?”
재미?
순간, 아주사 요꼬가 지하실에서 느꼈을 참
담한 절망감이 내 가슴을 짓눌렀다. 나는 대답
대신 담배를 물었다. 윤석은 물끄러미 내 얼굴
을 바라보다가 일본에서 있었던 일들을 비교
적 상세히 들려 주었다.
메모지에 쓴 것처럼, 나는 다음날 심령학회
회장과 함께 경찰서로 요꼬를 만나러 갔어. 우
리가 갔더니 요꼬는 데리러 갔는데 아직 안 와
있더라고.
그 당시 요꼬는 경찰로부터 살인 용의자 중
에 한 명으로 지목을 받고 있었지. 하지만 일
체 증거가 없다 보니 영장도 발급받지 못한 상
태였어. 그래서 구속 수사는 할 수 없었지.
십여 분쯤 기다리고 있으니 경찰관 둘이 요
꼬를 데리고 왔더라고. 요꼬는 내가 사진에서
본 것보다 나이가 먹어 보였지. 가부끼에 나오
는 배우들처럼 무표정하면서도 창백한 얼굴로
그녀가 들어섰어.
나중에 경찰에 들은 바에 의하면 수사관들
이 데리러 가자 기다렸다는 듯이 따라나서더
라는 거야. 요꼬는 그 전에도 한 번 경찰의 심
문을 받았는데 경찰 측에서는 이렇다 할 자백
이나 증거를 찾아내지 못했다더군.
그러니까 그 날의 자리는 심령학회 사람들
을 위한 자리라고도 할 수 있지. 요꼬를 만나
러 조사실에 들어간 사람은 심령학회 회장하
고 총무, 그리고 학국 심령학회 대표 자격으로
나하고 같이 간 김 선배, 심리학자와 담당 형
사 등 모두 해서 일곱 명이었어.
하지만 이 날 조사를 지켜본 사람은 이들 말
고도 여럿 있었지. 주로 경찰서 사람들인데 이
들은 안에선 밖이 안 보이지만 밖에선 안을 들
여다볼 수 있는 유리창을 통해서 조사 과정을
지켜보았지. 소리는 안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
해서 들으면서.
조사실은 상당히 넓었어. 요꼬가 중앙에 앉
고 우리는 그녀를 위주로 해서 둘러앉았지. 요
꼬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눈을 다소곳이 내리
깔고 앉아 있었어. 키는 150센티가 조금 넘어
보였고 몸무게는 40킬로를 넘을 것 같지 않았지.
몸매가 너무 왜소해 보여서 지옥 같은 곳에
서 140여일을 견딘 수기 속의 아주사 요꼬라
고 믿기지 않더군. 이런 여자가 정말로 세 명
을 토막냈을까 생각하니 회의마저 일더라고.
잠깐 우리를 올려다보았는데 마쓰다의 표현
처럼 눈이 크고 아름답더군. 난 그녀의 눈동자
를 들여다보다가 한순간이었지만 뭔가 번뜩이
는 것을 보았지. 그녀는 이내 고개를 숙였으나
나는 이 여자가 정말로 토막 살인 사건을 저질렀
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어.
그녀의 검은 눈동자에서 번뜩이던 것을 뭐
라고 해야 할까? 한이라고 할까, 아니면 숨어
있는 요꼬의 또다른 얼굴이라고 할까? 하여튼
그녀는 겉으로 풍기는 연약한 이미지와는 상
반되는 그 무언가를 감추고 있는 것 같았지.
담당형사가 간략하게 우리 소개를 한 뒤에
곧바로 심문에 들어갔지. 녹음용 테이프가‘짜
르르르’하고 돌아가자 담당 형사가 질문을 던
졌어. 주로 토막난 채로 발견된 손님에 대한
기억과 동료 미용사와 그 애인과의 관계에 대
한 것들이었지.
요꼬는 침착하게 하나하나 질문에 성의껏
답을 했어. 담당 형사는 손에 들고 있던 1차 심
문 자료를 바탕으로 해서 했던 질문을 반복해
서 던졌는데 요꼬의 대답은 심문 자료와 거의
일치했지.
담당 형사의 질문이 끝나자 이번엔 심리학
자가 지하실에 갇혀 있을 때 느꼈던 감정에 대
해서 물었어. 세상에 대한 분노를 느끼지는 않
았느냐, 누군가를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갑
갑함을 느끼지는 않았느냐, 밖에 나가면 뭐가
제일 하고 싶었느냐 주로 이런 류의 질문이
었어.
난 흥미를 느끼고 귀를 기울였지. 요꼬는 세
상에 나가면 후회없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
짐했었고 지금도 그렇다며 교과서적인 답을
늘어놓았지. 그러자 심리학자가 이번에는 히
데오란 남자에 대해서 질문을 던졌어.
히데오가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느냐, 동료 미용사와 그
애인에게서 질투를 느끼지는 않았느냐 하는
것들을 집요하게 물었지. 요꼬는 히데오 이야
기가 나오자 처음에는 침울해지더니 그가 행
복하게 살 길을 진정으로 바란다고 대답하더군.
오랜 시간 심문을 했지만 심리학자도 별다
른 소득 없이 물러서고 말았지. 침묵이 이어지
자 담당형사가 심령학회 회장과 총무를 보고
질문이 있으면 하라고 했지. 그러자 회장과 총
무는 서로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나와 김
선배를 보고 물어 보고 싶은 게 있으면 물어
보라는 거였어.
난 그래서 일종의 충격 요법을 쓰기로 했지.
아주사 요꼬의 평온함 감정을 깨야겠다고 마
음먹은 거야. 담당형사나 심리학자는 살인자
가 아닌, 단순한 용의자에 불과한 요꼬의 감정
을 최대한 존중하여 직접적인 질문은 피했으
나 난 직접적인 질문을 던지기로 작정을 했지.
난 세련되지 못한 일본어로 다짜고짜 물었지.
“맛있었습니까?”
“네?”
요꼬는 무슨 말인지 몰라 눈을 크게 뜨고 물
었지. 다른 사람들도 무슨 말인지 궁금한지 내
입만 쳐다보는 거였어. 나는 다시 물었지.
“맛있었습니까?”
“뭐가요?”
요꼬가 호기심 가득한 눈을 빛내며 다시 반
문했어. 그때 내가 하려는 말을 눈치챘는지 김
선배가 내 팔을 잡고 만류하더군. 참관인 자격
으로 온 우리가 이래서는 안 된다는 듯이.
순간, 내 추측이 틀리다면 아주사 요꼬에게
아주 큰 결례를 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
지. 그냥 조용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물
러설까 하다가 내친 걸음이니 가 보는 데까지
가 보자고 작정했어.
“내 질문은 당신의 단골 손님과 당신의 동
료와 애인 그러니까 당신이 죽인 사람들의
고기가 맛있었느냐는 거죠?”
아주사 요꼬의 표정이 곧바로 굳어졌지. 갑
자기 방안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어. 담당 형사
는 나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심리학자는
기가 막힌지 입을 헤 벌리더군. 심령학회 총무
와 김 선배는 안절부절 못하고. 조사실 유리창
을 통해 지켜보던 경찰 관계자들도 시껍했겠지.
놀라지 않은 사람은 심령학회 회장뿐이 없
더군. 웬만한 귀신은 불러서 호통쳐서 저편의
세계로 돌려 보낸다고 하더니 배짱이 보통이
아니더라고.
요꼬는 내 질문에 대답을 안 하고 눈을 내리
깔더군. 난 그래서 다시 질문을 던졌어.
“다쓰다 다까히로 씨를 아시죠? 12명을 죽
인 희대의 살인마. 설마 당신이 모른다고 하지
는 않겠죠. 당신을 지하실에 140여일 동안 감
금시킨 장본인이니까.”
다시 실내가 술렁거렸지. 요꼬는 미간을 잔
뜩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어. 담당 형사가
문을 열고 후다닥 밖으로 나가더군. 밖에서 지
켜보고 있는 상사에게 질문을 중지시켜야 하
느냐 아니면 그대로 두어야 하느냐고 물으려
는 것 같았지. 난 중단할 때 중단하더라고 끝
까지 가 보고 싶어서 다시 질문을 던졌어.
“물론 당신은 아니라고 회피하고 싶겠죠. 그
런 끔찍한 경험을 한 적이 없노라고. 그럼, 이
글을 기억하시겠습니까?”
난 너에게 보내기 전에 복사해 둔 그녀의 수
기와 마쓰다 다까히로의 수기, 그리고 애견가
살인사건에 대한 관련 자료들을 내밀었지.
담당형사가 다시 조사실로 들어오더니 자기
자리로 가서 앉더군. 상사가 그냥 지켜보고 있
으라고 했나 봐.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는
속셈이었겠지. 나중에 법정에서 인권 유린 문
제가 거론되더라고 자신들이 아닌 제삼자가
한 짓이니 충분히 빠져 나갈 수 있다고 판단했
을 거야.
“이게 뭐죠?”
수기를 뒤적거리던 요꼬가 미간을 잔뜩 지
푸리고 물었어. 다른 사람들도 그게 뭔가 궁금
한지 나만 쳐다보았지.
“당신의 쓴 수기예요. 설마 자신의 글씨도
모른다고 발뺌하시지는 않겠죠?”
요꼬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지. 담당형
사가 다시 부리나케 밖으로 뛰어나가더군. 금
고에 넣어 두었는데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렸다고 심령학회 회장이 발뺌하던 수기의
복사본이 나왔으니 그럴 만도 했겠지.
총무는 눈을 아예 꼭 감고 회장은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더군. 난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
서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지.
“요꼬 양이 쓴 글씨가 맞긴 맞나요? 왜 대답
이 없죠?”
내가 대답을 재촉하자 그녀는 느릿느릿 고
개를 끄덕였지. 뭔가 떠오르는지 기억을 되살
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읽어 보세요. 나머지 자료들도.”
읽기를 주저하고 있던 그녀가 내 말에 용기
를 얻었는지 고개를 떨구고 자신이 쓴 수기부
터 읽어 나가기 시작했지. 실내에 묵직한 침묵
이 흘렀어. 누군가 침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정도로.
나는 내심 누군가 뛰어들어와서 요꼬의 손
에 들린 자료들을 빼앗아 가 버리면 어떡하나
하고 불안해하고 있었지. 하지만 내가 우려하
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어. 그들도 요꼬의 반
응이 궁금했던 모양이야. 밖으로 뛰쳐나간 담
당형사는 아예 들어오질 않더군.
숨 막히는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요꼬의 페
이지 넘기는 소리만 간혹 들려 왔지. 나는 요
꼬의 표정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계속해
서 주시했지. 요꼬가 공포에 질려 내가 쓴 게
아니라고 부정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서. 그럴 땐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궁리하면서.
하지만 요꼬의 반응은 의외로 차분하더군.
자신의 수기를 다 읽고 나서 입술을 꼭 깨문
채 마쓰다 다까히로의 노트를 읽어 나가기 시
작했지.
난 그녀가 읽어 나가는 부분과 그녀의 표정
을 번갈아가며 살폈어. 한순간 그녀가 충격을
받았는지 입을 쩍 벌리더군. 무슨 내용을 읽었
기에 그러나 싶어서 재빨리 복사본을 보았지.
마쓰다가 요꼬에게 사람고기를 끓여서 갔다
주는 부분이었어.
그녀는 멍하니 기억을 더듬다가 한참 뒤에
다시 읽어 나가기 시작했지. 좀 전과는 달리
빠른 속도로. 내가 볼 때는 그녀는 글을 읽는
게 아니라 뭔가를 생각하면서 건성으로 페이
지를 넘기는 것 같았어.
마쓰다의 노트를 덮은 요꼬는 자신의 수기
를 대충 다시 한 번 보더군. 그리곤 수기를 덮
으며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았어. 그녀의 눈동
자 속에는 온갖 의혹과 불신이 뱀처럼 얽혀 있
었지.
“여기 감금된 여자는 정말 저였나요?”
금세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은 눈빛이었
지. 그녀는 아마도 나에게서, 다른 여자가 쓴
수기를 당신이 옮겨 쓴 거라는 대답을 듣고 싶
어했는지도 모르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
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어. 조사실에
서는‘금연’이라고 들어설 때 주의를 받았지
만 더 이상 참을 수가 없더군.
난 그녀의 표정을 볼 용기가 없어 고개를 떨
군 채 불을 붙였지.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
려 왔지.
“그럼 저는 교통사고를 당한 것이 아니라 이
사건 때문에 정신 병원에 입원을.”
나는 순간적으로 치솟는 분노를 느꼈지. 그
녀가 스스로 잊고 싶어한다고 해서 그녀가 기
억을 감추도록 도와 준 정신과 의사들에게. 아
니, 어쩌면 연약한 그녀의 상처를 덮어 주지
못하고 들추어내는 나란 놈의 잔혹성에 대해
서 분노한 건지도 몰라.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목청을 높여 빠르게 말했지.
“네, 그래요! 당신은 140여일 동안 지하실에
감금돼어 있었어요. 희대의 살인마에게 납치
되어서! 사람고기를 먹으며. 이제 진실을 아시
겠나요?”
“그랬군요.”
요꼬가 고개를 떨구며 울먹였지. 연약한 그
녀의 모습을 보니 다시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
어. 머릿속을 맴돌고 있던 질문을 다시 던졌지.
“오랜 만에 사람고기를 먹으니 맛있던가요?”
내 질문은 그녀가 세 사람을 죽인 살인자로
밝혀지지 못한다면 차후에 문제가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지.
다른 사람들은 더 이상 나를 만류하려 들지
않았지. 아니, 그들은 도리어 내가 요꼬를 궁
지에 몰아넣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희열을 느
끼는 것 같았어. 인간의 내면속에 숨겨져 있는
잔혹성이 순간적으로 이성을 지배한 거겠지.
요꼬는 눈가로 흐르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닦으며 나를 정면으로 쳐다보았어. 그리곤 나
의 최대의 약점을 건드렸지.
“무슨 근거로 내가 살인을 했다고 생각하
죠? 무슨 증거라도 있나요?”
요꼬가 계속해서 부정한다면 내세울 만한
증거는 나에게 하나도 없었지. 하지만 난 그녀
가 살인을 했다는 확신을 지니고 있었어. 그녀
의 큰 눈 속에 숨어 있는 살인자를 보았거든.
난 목소리에 힘을 실어 정중하게 물었지.
“요꼬 양! 왼손 새끼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는 무슨 반지죠?”
“네? 아, 이거요.”
느닷없는 내 질문에 그녀는 깜짝 놀라다가
왼손을 쳐들었어. 그리곤 말을 이었지.
“어머니의 유품이에요. 교통사고로 돌아가
신 어머니의 하나뿐인.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묻죠?”
“난 요꼬 양을 만난, 한 시간 삼십 분 동안
요꼬 양을 관찰했습니다. 요꼬 양은 죽은 피해
자의 이름이 나올 때, 사람을 먹는 이야기나
글을 읽을 때, 죽음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나
글을 읽을 때 왼손 새끼 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무의식 중에 만지더군요. 내가 오랜 만
에 사람고기를 먹으니 맛있었느냐고 물었을
때도 역시 그 반지를 돌렸어요.”
“제가요?”
“그래요!”
“좋아요! 그렇다고 해요. 그런데 그게 어쨌
다는 거죠?”
“반지를 만지는 건 요꼬 양의 마음이 불안하
기 때문이에요. 마음이 불안할 때마다 어머니
에게 기대고 싶어 반지를 만지는 거죠.”
“아 아녜요!”
“부정하려 들지 말아요. 반지를 빼내고 거짓
말 탐지기로 조사를 해 보면 다 드러날 테니까요!”
요꼬 양은 안간힘을 쓰며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있었어. 목 위에 얹힌 머리가 무척이나
무겁게 보였지. 난 내가 준비한 마지막 화살을
쐈어.
“난 요꼬 양이 외로움을 탄다는 걸 잘 알아
요. 어머니가 죽은 뒤로 요꼬 양에게는 마땅한
말동무가 없었어요. 아버지와 동생이 있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개인적인 고민이나 속
마음을 털어놓을 수가 없었죠. 그러다 히데오
씨를 만났지만 당신은 히데오 씨에게 마음을
줬다가 버림받으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 때
문에 그의 접근을 꺼렸어요. 결국 그는 떠나가
고 다시 혼자가 되자 외로워서 미칠 것만 같았
죠. 그래서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아녜요, 아녜요!”
갑자기 요꼬가 얼굴을 두 손에 파묻고 도리
질을 했어. 슬피 흐느끼는 그녀가 더없이 측은
해 보였지. 그녀는 한동안 울다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었지.
“의식적으로 저지른 건 아니었어요. 물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도 아니었고요. 뼈마
디가 시리도록 외로운 건 사실이었지만.”
그녀는 울음 때문에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
지. 담당 형사가 와서 그녀 앞에 물을 놓고 가
더군. 그녀는 물을 한모금 마신 뒤에 다시 입
을 열었지.
“처음엔 악몽인 줄 알았어요. 밤마다 꿈을
꿨었거든요. 음침한 지하실에 감금되어 있는.
자고 일어나면 너무도 생생해 점점 이것이 나
의 잊어버린 기억의 일부분이 아닐까 하는 생
각이 들었지요. 하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힘들었어요. 계속 꿈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죠.”
“지하실에서의 기억은 그렇다 하더라도 왜
단골손님과 미용실 동료, 그녀의 애인을 죽였죠?”
“저도 모르겠어요. 단편적으로 떠오르긴 하
지만 저는 오늘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제
가 또다른 악몽을 꾼 거라고 생각했어요. 주변
사람들이 끔찍한 일을 당해서 제가 그런 악몽
에 시달리는 거라고.”
요꼬는 격앙된 감정을 빠른 속도로 가라앉
혀 나갔지. 핸드백에서 꺼낸 손수건으로 눈두
덩이를 찍으며 그녀는 평온을 되찾아갔어. 겉
으로는 한없이 약해 보이지만 강한 무언가가
그녀의 내면속에 숨어 있다는 것을 엿볼 수 있
었지.
“단편적인 기억이라뇨? 어떤 거죠?”
나는 그녀가 다른 생각을 못하도록 틈을 주
지 않고 질문을 던졌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살인을 하지 않았노라고 발뺌을 할까봐.
“배가 고팠던 기억이 나요. 미용실에 자주
오던 단골 아주머니가 선물이라며 손수건을
들고 찾아왔던 기억이 어렴풋이 나고요. 그뒤
로는 끔찍한 악몽이었어요.”
“악몽이요? 어떤 악몽이요?”
“그 아줌마가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제가 따
라가서 칼로 찔렀어요. 그리고 욕조에 넣고 그
아줌마를 토막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간신히
자른 머리와 몸통을 가방에 넣어 도쿄만에 버
리려는데 열댓살 먹은 애가 지켜보았던 일. 그
리고 그리고.”
“그리고 뭐죠?”
“고기를 맛있게 구워 먹었던 일이 기억나요.
규동(注: 일본에서 라면과 함께 가장 많이 먹
는 대중적인 식사. 우리 식으로 하면 고기덮밥
정도)과 스끼야끼(注: 구운 돼지고기와 밥)를
만들어 먹었어요. 설마 그것이 사람고기는
아니었겠죠?”
“또 기억 나는 건 뭐죠? 꿈이어도 상관 없으
니 사실 대로 털어놓으세요. 편안하게.”
“그리고 웬 뼈를 아파트 화단에 묻었던 기억
이 어렴풋이 나요. 그리고 얼마 있다가 제가
미찌꼬네 집에 놀러가는 꿈을 꾸었죠. 미찌꼬
는 남자친구인 와다나베와 무슨 요리를 만들
고 있었어요. 무슨 튀김이었는데. 하여튼 둘이
서 즐겁게 요리를 만드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갑자기 허기가 졌어요. 참을 수 없을만큼.
저는 와다나베의 머리카락을 잡고 기름 솥
에 처넣었었어요. 꿈이어서 제가 힘이 셌었나
봐요. 미치꼬까 비명을 지르더군요. 저는 주방
용 칼로 그녀의 가슴을 찔렀어요. 그리곤 화상
으로 괴로워하는 와다나베의 얼굴에다 찬물을
확 끼얹었죠. 그랬더니 와다나베의 얼굴이 지
글거리더니 그래도 앞으로 고꾸라졌죠. 쇼크
사로 죽은 것 같았어요.
저는 꿈이라서 그런지 양심의 가책이나 잔
인하다거나 하는 느낌은 못 받았죠. 저는 마치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듯이 그들을 토막냈어
요. 전기드릴로요. 그 다음에 장롱 위에 얹혀
져 있는 여행가방을 꺼내 그들의 머리와 몸통
을 숨겼어요.
부엌칼과 드릴은 차 트렁크에 실어가지고
오다가 하천에다 던져 버렸어요. 그리고 나머
지 부위는 제가 집으로 가져와 냉장고에 넣어
두었는데 그런데 설마 제가 정말로 이런 일
들을 저지른 건 아니겠죠?”
요꼬는 현실과 꿈이 분간이 안 가는지 몽롱
한 눈빛으로 비교적 담담하게 말을 했다. 정신
상태에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요꼬 양, 혼자서 그런 일을 하기가 쉽지 않
았을 텐데 혹 도와 주는 사람은 없었나요? 꿈
에서라도.”
“아녜요. 아무도 없었어요. 저 혼자서 했죠.
하지만 그 놈은 항상 주변 어딘가에 숨어서 제
행동을 지켜보고 있었어요. 생각만 해도 소름
이 끼쳐요.”
“그 놈이라뇨? 누구를 가르키는 거죠?”
“사람은 아녜요. 보기만 해도 심장이 멎을
것만 같은 붉은 눈이에요. 처음에는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는데 점점 눈길이 부드러워졌
죠. 그 놈은 제가 하는 행동을 일일이 지켜봤
어요. 헉! 보여요! 저, 저기.”
요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천장을 손
가락으로 가르켰어. 나는 재빨리 시선을 들었
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 요꼬는 충격을
받았는지 몸을 부들부들 떨다가 그대로 쓰러
졌어.
그래서 심문이 중지됐지. 의사가 달려와 한
참 뒤에 그녀는 의식을 되찾았지만 심문을 계
속할 분위기는 아니었어. 그녀은 모든 기력이
쇠진한 것처럼 보였거든. 바람이 불면 꺼져 버
릴 촛불처럼.
담당형사가 요꼬를 부축해서 조사실을 나갔
지. 걸어나가는 왜소한 그녀의 몸짓을 보고 있
으니 요꼬가 더없이 불쌍하게 느껴졌지. 그래
서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지.
“요꼬 양, 당신은 꿈을 꾼 거요. 그것도 지독
한 악몽을.”
요꼬가 들었는지 돌아보고는 힘없는 미소를
띄웠어. 금방이라도 지워져 버릴 것 같은 그런
미소를.
조사실에서 나오니 경찰서장이 직접 고마움
을 표하더군. 사건 해결에 큰 도움을 주었다면
서. 난 연신 허리를 굽신거리는 그를 보고 있
으니 입안이 씁쓰름해지더군. 만에 하나 요꼬
가 변호사를 사서 인권 문제를 들먹거렸다면
그는 필경 나를 방패막이로 내세우고 뒤로 빠
졌을 테니까 말야. 결코 손해 보지 않으려는
일본인의 단면을 경찰서장을 통해 보았지.
요꼬의 증언을 토대로 해서 수사대가 급파
되었어. 경찰 서장실에서 우리가 차를 마시는
사이에 요꼬의 아파트 화단에서 사람의 뼈가
발견되었고, 요꼬의 방 천장에서 사람의 허벅
지와 팔로 추정되는 부위를 찾았다는 보고가
쏙쏙 들어왔지.
범행에 사용된 흉기만 찾으면 수사는 일단
락 될 것 같았어. 심령학회 회장이 이만 일어
나자고 해서 우린 경찰서장실을 나왔지. 난 경
찰서장과 헤어지면서 요꼬의 증언 테이프를
하나 얻을 수 없겠냐고 정중하게 부탁했어.
경찰서장은 곤란한지 한동안 난감해하다가
요꼬 수사에 협조한 나의 공로를 인정해서 특
별히 테이프를 하나 복사해 주겠다고 했지. 그
리곤 즉석에서 부하를 불러 녹음한 테이프를
하나 복사해 오라고 지시했어.
다시 앉아서 기다리고 있는데 부하가 허겁
지겁 뛰어들어오더니 테이프에 아무것도 녹음
이 안 되어 있더라는 거야. 하도 이상해서 녹
음기를 점검해 보았지만 이상이 없더라고.
결국 녹음 테이프도 못 얻은 채 경찰서를 나
설 수밖에 없었지. 나는 호텔로 돌아와서 일본
심령학회 회장이 마련한 저녁 파티에 갈 준비
를 하고 있었어. 그런데 뜻하지 않게도 경찰서
장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거야. 요꼬가 혀를
깨물고 자살했다면서.
잠깐 졸다가 따귀를 맞은 듯이 참으로 황당
하더군. 수화기를 멍하니 들고 있는데 경찰서
장은 내가 심문을 무자비하게 해서 이런 일이
발생한 게 아니냐는 식으로 몰아붙이는 거야.
참으로 기가 막히더군. 바로 몇 시간 전까지
만 해도 굽신굽신거리며 감사를 표하던 사람
이 이번엔 나 때문에 일이 이 지경이 되었다며
다그치니. 한마디 쏘아 주려다가 도무지 상종
못 할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어 잠자코 수화기
를 내려놓았지.
언론에선 뭐라고 떠들어댈지 참으로 궁금하
더군. 난 회장의 초대를 다음으로 미룰까 하다
가 내일 아침에 조간 신문을 볼 생각으로 저녁
만찬에 참석했지. 회장에게 요꼬가 자살했다
는 소식을 전했더니 회장도 깜짝 놀라더군. 지
하실에 감금되어서도 140여 일을 견딘 견딘
요꼬가 그렇게 허망하게 목숨을 끊을 줄은 몰
랐다면서.
우린 그녀의 가련한 영혼을 위해서 술잔을
마주 쳤고, 난 그날 저녁에 엉망으로 취했지.
내가 그녀의 영혼을 죽였기에 요꼬가 자신의
육체를 죽였을 거라는 자책감에서 벗어날 수
가 없었어.
다음날 아침에 숙취에 시달리며 신문 사회
면을 읽었지. 요꼬의 살인 사건도 마쓰다 다카
히로의 살인사건처럼 축소되어 발표되었더군.
요꼬는 정신병원에 입원한 경력까지 있고 해
서 완전한 정신병자로 보도되었어. 사회면 어
디에도 마쓰다 다까히로에게 감금되었다가 풀
려났다는 요꼬의 전력이 실리지 않았고, 요꼬
가 증언한 식인(食人)에 관계된 기사도 찾아볼
수 없었지. 후훗!
윤석이 얼추 이야기를 끝냈는지 자조적인
미소를 띄웠다. 요꼬의 자살로 인한 죄의식으
로부터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중에 요꼬 사건을 맡았던 담당형사를 만
나 들은 바에 의하면 요꼬는 죽어 가면서 자기
입에서 나온 피로 뭔가 쓰려고 했었대. 이런
모양이었지.”
글라스에 담긴 물을 손가락으로 찍어서 윤
석은 탁자 위에다 달 월(月)자를 썼다.
“달 월 자 아냐?”
“비슷해. 하지만 달 월 자를 쓰려고 했던 것
은 아니야. 잘 생각해 봐. 내가 답은 이따가 이
야기해 줄게.”
윤석은 말을 끊고 웨이터를 손짓해 불렀다.
“야, 너 배 안 고프니? 갑자기 허기가 지는데.”
“하긴 너 혼자서 쉬지 않고 떠들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난 커피나 한 잔 더 마셔야겠다.”
윤석은 웨이터에게 정식으로 비후까스와 아
이스커피를 주문했다. 난 달 월 자가 의미하는
게 뭐냐고 물어 보았지만 윤석은 스스로 생각
해 보라며 대답해 주지 않았다.
음식이 나오자 윤석은 나이프와 포크가 보
이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먹어 치웠다. 끔찍
한 이야기를 하고 나서도 저토록 왕성하게 먹
을 수 있는 식욕이 부러웠다.
“야, 너희 조상이 식인종 아니냐. 무슨 고기
를 그렇게 씹지도 않고 삼키냐?”
“배고프면 다 어쩔 수가 없는 거다. 문명인
과 야만인의 차이는 먹고 사는데 여유가 있느
냐 없느냐에 달려 있는 거야.”
웨이터가 빈 접시들을 치워 갔다. 윤석은 담
배를 물고 소파에 기댔다.
“따지고 보면 인간의 행복이란 게 별 거 아
냐.”
윤석은 배를 손바닥으로 비비며 느긋한 표
정으로 담배연기를 피워 올렸다.
“행복 타령은 나중에 하고 이야기나 마저 하
자. 마쓰다 다까히로의 수기에 나오는‘그 놈’
은 뭐야? 그 시뻘건 눈이라는 거. 아주사 요꼬
도 경찰서 조사실에서 언급했다면서?”
“그 부분은 나도 확신이 안 가. 그 이야기는
이따 하기로 하고 일본에서 있었던 일들을 마
저 들려 줄게. 요꼬가 자살한 다음날 우리는
원래의 일정대로 마쓰다 다까히로의 집으로
출발했어.”
윤석은 냉수를 한잔 마시고 나서 다시 이야
기를 시작했다. 나는 달콤한 밀어를 나누는 연
인들의 모습을 훔쳐 보면서 윤석의 끔찍한 이
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우리 일행은 모두 다섯이었어. 경찰서에 갔
던 네 사람에다 다까시라는 영능력자가 포함
되어 모두 다섯이었지. 우린 아침 일찍 출발했
지. 회장은 마쓰다의 개농장이 있는 마을까지
가려면 한시간 반은 걸릴 테니 한숨 자라고 하
더군.
난 잠도 오지 않아 바깥 경치를 구경했지.
한국의 거리와 비슷해 이국적인 분위기는 전
혀 느낄 수 없더군. 고속도로를 타고 한 시간
쯤 가다가 간선도로로 빠져 사십 분 가량 가니
까 작은 마을이 보이더군.
마을은 한국의 농가를 연상시키듯 아담했
어. 마을 사람들도 하나같이 순박해 보였지.
초능력협회 회장이 온 지가 하도 오래 되어서
기억이 가물가물거린다고 하더군. 그래서 내
가 슈퍼에 들어갔지. 음료수를 좀 사면서 삼십
대의 주인 여자에게 개농장으로 가는 길을 물
어 봤어.
참 문화란 게 이상하더군. 우리 같으면 말
야, 끔찍해서 대충 가르쳐 주고 말 텐데 그 여
자는 친절하고도 상세하게 가르쳐 주는 거야.
마치 마을의 명소를 자랑하듯이 미소까지 띄
우면서.
그녀는 지난주에 개농장에 원인 모를 화재
가 일어나 집이 깡그리 타서 찾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하더군. 재미있지 않느냐는 듯이 눈을
빛내면서.
슈퍼를 나서는데 마치 유령의 마을에 들어
온 듯 기분이 께림칙하더군. 차에 올라 십여
분이나 지났을까. 이번에는 비가 부슬부슬 내
리기 시작하는 거야. 슈퍼 주인이 그려 준 약
도를 가지고 찾아가니 개 농장은 폭격 맞은 듯
폭삭 주저앉아 있더군.
참으로 허탈하대. 내심 살륙의 현장을 볼 수
있겠구나 해서 많은 기대를 했는데 말야. 나는
빗속에서 잿더미를 들추어 봤어. 살륙에 사용
한 흉기라도 발견할 수 있을까 해서. 한참을
찾았지만 경찰에서 가져갔는지, 어딘가에 파
묻혔는지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더군. 우린 다
까시라는 사람에게 마지막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어.
다까시는 현장을 둘러보더니 잿더미 위에
결가부좌를 틀고 앉아 명상을 하더군. 나중에
알고 보니 다까시는 명상을 했던 것이 아니라
정신을 집중해서 이상한 기를 느끼거나 과거
에 있었던 일들을 투시하려고 했던 거야.
한동안 죽은 듯이 앉아 있던 다까시가 한참
뒤에 눈을 뜨더군. 몸서리를 치면서. 내가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느냐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랬지. 12명이나
끔찍한 죽음을 당한 뒤, 먹히기까지 한 장소인
데 왜 음침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겠느냐고. 생
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하다고.
다까시가 가만히 고개를 젓더니 모두 이리
와서 앉으라고 하더군. 우린 다까시가 시킨 대
로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눈을 감았지. 숨을
고르고 일명‘제3의 눈’이니‘천안(天眼)’이니
하는 미간 위의 한가운데에다 흩어진 의식들
을 모았어.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귓가에서 끔찍한
비명소리가 들려 왔지. 한 사람의 절규가 아니
었어. 눈앞에 빠른 속도로 처참한 광경 도끼
로 내리치고, 피가 튀고, 뜨거운 물에 넣고, 전
기톱으로 산 사람을 자르고 차마 상상하기도
힘든 엄청난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어.
그러다 한순간, 등 뒤에서 섬칫한 기운을 느
꼈지. 지금까지 느꼈던 기운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난 내가 죽는 줄 알고 눈을 번쩍 떴지.
다른 사람들도 나와 비슷하게 눈을 떴어. 계속
해서 눈을 감고 있는 사람은 다까시뿐이었어.
다까시의 얼굴 근육이 흔들리더군. 그는 마치
무엇과 처절한 투쟁을 벌이듯이 땀을 뻘뻘 흘
렸어. 그는 한참 동안 그러고 있다가 눈을 슬
그머니 떴지.
다까시는 두려운 목소리로 뭔가가 있다고
말하더군. 아주 강한 무언가가 있다고. 내가
그래서 그게 뭐냐고 물어 봤지. 그랬더니 기운
이라는 거야. 사악한 기운이 이 일대를 감싸고
있대. 자신과는 게임이 안 돼니 어서 이곳을
빠져 나가자는 거야.
다까시는 이마의 땀을 연신 훔치다 벌떡 일
어섰지. 우린 모두 긴장했어. 그래서 다까시의
말 대로 빠르게 차 있는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
했지. 그러다 난 발을 잘못 디뎌 몸의 중심을
잃었어. 옆에 형체만 남아 있던 벽을 짚었는데
벽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지.
난 벽과 함께 넘어졌는데 벽 위쪽에서 뭔가
가 떨어져 내 어깨를 때렸어. 사람들이 내게
달려왔어. 김 선배의 부축을 받아 일어서면서
발 밑을 보니 이상한 게 보이는 거야. 뭔가 유
심히 보았지. 해골이었어.
다까시가 해골을 유심히 보더니 주머니에서
봉투를 하나 꺼내 넣고 밀봉을 하더군. 우리는
차로 돌아와 해골을 살폈지. 우린 해골의 주인
이 누구일까에 대해 의견을 주고받았어.
총무는 마쓰다가 죽인 또 하나의 희생자일
거라고 추측했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어. 왜냐
하면 수기에는 희생자가 모두 12명이라 적혀
있었고, 경찰이 발굴한 유골도 정확히 12명이
었으니까.
회장은 유골은 성인 남자의 것이며 죽은 상
당히 오래 된 것 같다고 했지. 우린 여러 가지
의견을 주고받다가 혹시 13번째 희생자일 수
도 있으니 일단 경찰에 갔다 주기로 합의했어.
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봉투에 넣은 해골을
꺼내 보았지. 해골의 움푹 패인 두 눈을 한동
안 보고 있으니 가슴이 서늘해지더구나. 문득,
마쓰다 다까히로의 수기 속에 두 눈이 떠올랐
지. 참, 너 내가 두 눈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고
했었지? 넌 그게 뭐라고 생각하니?”
윤석은 갑자기 말을 끊고 내 의견을 물었다.
“글쎄.”
방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허를 찔린 기분이
었다. 한참, 재미있게 듣고 있는데 뜬금없이
내 생각을 알고 싶다니. 난 별로 내키진 않았
지만 윤석을 혼자만 떠들게 한 게 미안해 내
생각을 주섬주섬 늘어놓기 시작했다.
“너도 알다시피 난 유령이나 귀신, 악마의
존재에 대해서 신뢰하는 편은 아냐. 다시 말하
면 그런 것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하지
만 너처럼 존재한다고 확신하지는 않는다는
거야. 그래서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봤어.
먼저 마쓰다 다까히로에 대해서 이야기해
볼게. 마쓰다는 수기에도 나타났다시피 소외
된 삶을 살아온 게 분명해. 유년시절부터 성인
이 될 때까지 누구에게도 관심을 못 받고 자란
애정 결핍증 환자야. 그것도 중증이지.
마쓰다는 마을과 동떨어진 곳에서 혼자서
개를 키우다 보니 외로웠던 거야. 하지만 아무
도 그의 벗이 되어 주려고 하지 않았지. 그는
어린아이들에게까지 괄시를 받고 나니 냉정한
세상에 대해서 복수를 하고 싶었어. 그렇게 해
서라도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싶었던 거지. 내
면 속에 쌓여 있는 분노를 해소할 수 있는 방
법으로 그가 택한 것이 바로 살인이야.
수기를 주의 깊게 읽어 봐. 수기는 마치 마
쓰다가 누군가에게 읽히려고 쓴 것 같은 느낌
이야. 마쓰다는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종말이
올 걸 안 거야. 그래서 누가 읽어 볼 걸 대비해
서 하나의 장치가 필요함을 느꼈지. 바로‘두
눈’이 마쓰다가 설치해 놓은 장치야.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어하는 경향이 있지. 마쓰다 역시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하고 싶었어. 자신은 훗
날 죽든지 체포된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로
부터 사랑 내지는 동정을 받고 싶었던 거야.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바로‘두 눈’이야. 비
록 자신이 그렇게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다 하
더라도 자신의 행위가 아닌, 누군가의 강요에
의한 행위라고 스스로 믿고 싶었던 거야. 그래
야 남들도 그렇게 믿어 줄 것 아니겠어?
마쓰다가 아주사 요꼬를 살려 주었던 것도
그래서였을 거야. 정말로 그녀를 사랑했을 수
도 있겠지만. 하여튼 마쓰다는‘봐라! 난 착한
데 놈이 시켜서 이런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 것
아니냐!’하는 식으로 세상을 향해 항변하고 싶
었던 거겠지.
심각한 정신 분열증 환자들은 자신이 만든
환상을 쉽게 믿어 버린다고 하더군. 내가 볼
때는 마쓰다도 그러지 않았나 싶어. 자신이 만
든 장치인‘그 눈’이 존재한다고 정말로 믿어
버린 거지.
나는 그 시기를‘회식 사건’이후라고 봐. 냉
대만 하던 마을 사람들이 마쓰다에게 친절을
베풀기 시작하자 사람들의 친절에 익숙치 못
했던 마쓰다는 혼란스러웠던 거야.
누군가 갑자기 찾아온 엄청난 행복을 깨지
않을까 염려하기 시작했고, 행복을 깰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궁리하는 가운데‘그 눈’은
허상이 하닌 실제하는 그 무엇으로 굳어져 버
린 거지.
그래서 마쓰다는 엽총으로 자신의 옆머리를
쏘는 방식으로 자살을 한 거야. 마치‘그 눈’
의 임자가 나타나 자신을 쏴 죽인 것처럼.
내가 너무 터무니 없는 가정을 한 걸까?
사실 내가 말은 이렇게 했지만 난 여전히
‘그 눈’의 실체에 대해서 자신이 안 서. 하지
만 내가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마쓰
다 역시 일본이라는 사회가 낳은 기형아라는
거야.
너도 알다시피 범죄율이 세계에서 제일 낮
은 나라 중의 하나가 일본이야. ‘옴진리교의
독가스 사건’이 터지기 전에는 세계 여러 나라
들이 일본의 안전을 부러워 했지.
일본은 범죄 검거율이 70%가 넘어. 선진국
의 대표적인 도시인 뉴욕, 런던, 파리가 고작
20% 수준인데 말야. 일본은 범죄율 역시 뉴욕
의 200분의 1, 런던과 파리의 30분의 1 수준이지.
하지만 일본의 범죄는 독특하게도 한번 사
건이 터졌다 하면 엽기적인 사건이 대부분이
야. 대표적인 예로 1989년에 있었던 미야자끼
사건을 들 수 있지. 소심하고 겁장이었던 미야
자끼 쯔또무라는 사람이 4살부터 7살까지의
여자아이 4명을 연속적으로 유괴해 살해했어.
그런데 이 미친놈은 아이를 죽이는 데서 그
치는 것이 아니라 살해한 애의 유골을 집에 보
낸다던가, 살해 장면을 비디오로 남기거나, 살
해한 애의 해골에다 무슨 흔적을 새기는 등 온
갖 엽기적인 행동을 다해 일본 열도를 공포로
몰아넣었지.
이렇듯 일본에는 다른 나라와 비교할 수 없
을 정도로 엽기적인 살인 행각이 많은 편이야.
이 외에 일본 범죄의 특징 중 하나로 무동기
범죄를 들 수 있지.
길을 걸어가는데 길거리에서 아무 이유없이
칼로 푹 찌른다던가, 지하철을 기다리는 사람
을 뒤에서 밀어 버리는 식의 무동기 범죄율이
다른 나라에 비해 월등히 높은 편이지.
일본 사람들은 이처럼 기괴한 범죄자들을
‘토리마’라고 부르는데‘토리마’란 길거리에
서 해를 끼치는 마물이라는 뜻이래. 마물이 아
닌 인간의 이성으로는 감히 그런 범죄를 저지
를 수 없다는 의미겠지.
무동기 범죄는 선진국에서 꾸준히 증가하는
추세에 있어. 정신병리학자들은 그 원인 중의
하나로 꽉 짜여진 현대 사회를 들고 있지. 숨
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잘 짜여진 통제 구조 속
에서 살다 보니 개인의 본능이 출구를 잃고 뒤
틀리다가 엉뚱하게 분출되어 나타나는 결과라
는 거야.
일본이라는 나라는 국민에게 많은 스트레스
를 주는데, 일본인은 속마음을 좀처럼 드러내
지 않는 민족성을 지니고 있다 보니 무동기 범
죄가 많이 발생할 수밖에.
내가 마쓰다 다까히로를 일본이 낳은 기형
아라고 보는 것도 이런 이유야. 개인의 삶보다
는 집단을 중시하는 일본 특유의 사고 방식.
일본의 비극은 마쓰다의 범죄가, 집단으로부
터 버림받은 정신적 기형아들이 지금까지 벌
여 왔고 앞으로도 벌일, 무수한 복수극 중의
한 편에 불과하다는데 있는 거야.”
“흥미 있는 추론이야.”
내가 이야기를 마치자 윤석이 빙긋이 웃으
며 말했다.
“네 생각은 어때?”
“나는 추론하는 쪽보다는 직접 뛰어다니면
서 물증을 잡아 밝히려고 하는 쪽이지. 넌‘그
눈’을 마쓰다 다까히로가 만들어 놓은 장치라
고 했는데 그렇다면 아주사 요꼬의 수기에 나
오는‘그 눈’은 어떻게 된 거지?”
“글쎄? 마쓰다 다까히로와 이야기하는 과정
에서 은연중에 받아들이게 된 게 아닐까?”
“그럼 넌 아주사 요꼬의 살인 동기는 어디에
있다고 봐?”
“모방 범죄가 아니었을까? 기억은 못 한다
고 하지만 무의식 속에 생생히 살아 있었을 테
니까 말야.”
“합리적인 생각이긴 해. 하지만 말야 일한
아, 너 현대인의 가장 커다란 허점이 바로 그
런 합리적인 사고에 있다는 걸 아니?”
“그렇 겠지. 진취적인 사고나 길들여지지
않은 사고를 거부하는 게 현대인의 사고니까.
합리적인 사고가 좋긴 하지만 자신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약점이 있을 수 있겠지.”
윤석이 다시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
다. 내 눈을 말없이 들여다보던 윤석이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그래, 기존의 사고에 붙들려서는 절대 안
돼. 자신이 가 보지 않았다고 해서 토성이 존
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사고는 곤란해.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이 세상 저편에 존
재하는 사후 세계를 부정해서도 안 돼.”
나는 윤석의 논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내가 반론을 제기하면 토론이 길어질 것 같아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빨리 일본에서 있
었던 사건의 뒷부분을 마저 듣고 싶은 마음뿐
이었다.
“내가 잠시 이야기를 멈추고 네 의견을 듣자
고 한 것은 나 나름대로 해답을 찾았지만 그
해답이 만족스럽지 않아서야. 석연찮은 점이
너무 많거든. 그래, 그 문제는 다시 이야기하
기로 하고 일단 일본에서 있었던 일을 마저 들
려 줄게.”
윤석이 내 마음을 알아챘는지 화제를 돌렸
다. 난 의자에 몸을 깊숙히 파묻고 담배를 물
었다.
“우리는 개농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경찰서
에 들러 해골을 넘겼어. 그리고 나서 사흘이
지났는데 심령학회 회장에게서 전화가 왔더라
고. 해골 문제로 경찰서장에게서 전화가 왔는
데 같이 가자는 거였어.
내 그러자고 했더니 회장이 차를 끌고 다까
시와 함께 왔더라고. 우리는 곧바로 경찰서로
가서 경찰서장을 만났지. 경찰서장은 우릴 무
척 반갑게 맞으면서 해골을 조사한 결과를 알
려 주는 거야.
그런데 놀랍게도 해골이 500여 년 전 거였
어. 서류에는 510에서 520년 전 사이에 죽은
걸로 적혀 있더군. 성별은 회장이 예상했던 대
로 남자고 사망시 나이는 40대 중반이라는 거
야. 키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거구라고 할 수
있는 170센티미터쯤 되며 사망 원인은 타살로
추정됨이라고 적혀 있더군.
경찰서장은 우리에게 이 해골을 어디서 발
견한 거냐고 다시 묻더군. 마쓰다 다까히로의
콘크리트 벽 속에 해골이 들어 있었다는 말은
신빙성이 없다며. 우리가 분명히 콘크리트 벽
속에서 나온 거라고 하자 경찰서장은 우리가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만 연신 갸
웃거리더군.
의아스럽기는 우리도 마찬가지여서 다음날
우리는 다시 개농장이 있던 마을로 갔어. 마쓰
다의 집이 지은 지 오래되지 않았다면 집을 지
은 건설업자라도 만나보려는 속셈이었지.
마을 사람들 이야기로는 마쓰다의 집이 지
어진 지는 소화 십오년 경이니 지금으로부터
오십오 년쯤 되었다는 거야. 그 집은 외지에서
들어온 젊은 부부가 손수 집을 지었는데 남자
가 정신병에 걸려 여자를 죽였다는 거야. 그
뒤로 한동안 폐허로 방치되어 있다가 20여 년
전쯤에 농사를 짓겠다고 내려온 중년 부부가
대대적인 수리를 해서 한동안 살았대.
그런데 이번에는 부부가 한꺼번에 실종되어
버렸대. 사람들은 그들이 여행을 간 거로 판단
하고 기다렸는데 십오년이 지나도록 아무 연
락이 없더라는 거야. 그러다 4년 전부터 마쓰
다가 집을 수리해서 개농장을 꾸며 놓고 살기
시작했대.
우리는 아무래도 그 집터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서 마을에서 제일 오래 살았다는 노인을
찾아갔어. 우리가 찾아간 노인은 아흔아홉 살
이라는데 정정하더군. 우리가 마을의 역사에 대
해서 알고 있는 게 있으면 들려 달라고 하자 노
인은 창고로 가더니 책을 한 권 꺼내 오더군.
노인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책이라면서
우리보고 오만 엔에 사라는 거였어. 회장이 책
을 살펴 보더니 흥정 끝에 이천 엔에 샀지.
회장은 도쿄로 돌아가면서 이야기하는데 놀
랍게도 그 책이 쓰여진지 사백여 년 되었다는
거야. 그러면서 한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짚더
니 읽어 주는데 일본 전국시대에 관한 거였어.
그러니까 약 500여년 다까무라 다모쯔라는
성주가 있었대. 그는 용맹한 장수였는데 전쟁
에서 승리하면 적군을 요리해 먹었다는 거야.
그의 흉폭함과 부하들의 잔인무도함이 널리
퍼져 감히 그에게 맞서려는 사람이 없을 정도
였대.
천하에 무서울 게 없던 다모쯔였지만 하루
는 사냥을 하다가 말이 무엇엔가 놀라는 바람
에 그만 낙상해 허리를 다쳤다는 거야. 온갖
명의들이 와서 치료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대.
성주가 병상에 오랫동안 누워 있으니 통치
가 제대로 되겠어. 용맹스런 부하들이 다른 성
주를 찾아나섰기 시작했지. 다모쯔의 부관인
오구라는 도저히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지난날의 명성을 되찾기 위한 방도를 강구한
거야.
몇날 며칠을 고민한 그는 다모쯔를 부하들
과 함께 잡아먹고 나서 자신이 성주가 되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지. 강한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교훈을 부하들에게 심어 주어, 더
이상의 이탈을 막기 위한 위한 오구라의 고육
지책이었어.
그런데 이 계획을 다모쯔가 눈치챈 거야. 오
구라가 큰 솥을 걸어놓고 찾아가자 다모쯔는
오구라에게 온갖 독설을 퍼부으면서 이 원한
은 백 년 아닌, 천 년이 지난다 해도 반드시 되
갚겠노라고 이를 갈았지.
결국 끌려가지 않으려 발악을 하던 다모쯔
는 솥에 넣어졌고 오구라는 부하들과 함께 눈
물을 흘리면서 다모쯔를 먹었다는 거야. 다 먹
고 나서 오구라는 다모쯔의 해골을 장대에 매
달고 다니며 깃발 대신 사용했대. 그 결과 오
구라의 부대는 오구라가 닌자에게 암살당하기
전까지 패배를 몰랐다는 거야.
지방의 이름없는 극단에서 상영하는 가부끼
에나 나올 만한 이야기지만 심령학회 회장과
총무는 그 책에 나온 기록을 전적으로 믿는 눈
치였어. 다까시는 아예 한술 더 떠서 개농장에
서 투시할 때 다모쯔의 혼령을 보았다고 하더
군. 그러면서 생김새까지 이야기하는데 할 말
이 없더라고.
나는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으니 일본인들
이 왜 그렇게까지 기를 쓰면서 교과서를 왜곡
하려 드는지 알겠더군. 그건 바로 일본인들이
기록에 약한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었어.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이들이 바로 일본
의 정치인이며 역사가들이니까.
하여튼 김 선배와 나는 그 기록을 믿지 않았
지만 그외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반론도 펴지
못했지. 내가 서울로 오기 바로 전날 심령학회
회장이 호텔로 전화를 걸었더군. 모레에 다까
무라 다모쯔 장군의 혼령을 위로하는 의식을
갖을 예정인데 출국을 늦추면 어떻겠느냐고.
난 그 의식이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 같아
정중하게 거절했지. 다음날 김 선배와 나는 총
무가 몰고 온 승용차로 나리타 공항으로 향했
어. 차 안에서 총무가 혹시 경찰서에서 해골을
가지고 오지 않았느냐고 묻더군. 그래서 왜 그
러느냐고 했더니 해골이 사라졌는데 경찰서장
이 나와 심령학회 회장을 의심하고 있다는 거
야. 수기를 빼돌린 전력도 있고 해서 말야.
김 선배와 난 아니라고 했더니 자기도 그럴
거라고 믿고 있지만 혹시나 해서 물어 보았대.
경찰서에서 해골이 없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으
니 기가 막히더라고. 해골이 발이 있어서 걸어
나간 것도 아니겠고 말야.
김 선배는 신기한 걸 모으기 좋아하는 일본
인의 성격상 경찰 서장이 빼돌렸을 지도 모른
다고 추측을 하더군. 하지만 난 영 찜찜하더
라. 무엇 하나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계속해서
의혹만 늘어가니 말야.”
윤석은 이야기를 마치고 창 밖을 보았다. 훤
한 대낮에 만났는데 어느덧 거리에는 짙은 어
둠이 깔려 있었다. 낮은 인간의 세계고 밤은
영혼의 세계라던 선배의 말이 문득 스쳤다. 정
말로 밤이 깊어지고 인간이 잠들면 인간의 영
혼들이 밤거리를 떠돌아다닐까?
“일한아, 그런데 수기에 나오는‘그 눈’은
무엇일까?”
윤석은 다까무라 다모쯔 장군의 혼령이‘그
눈’이라는 사실에 수긍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글쎄? 그 문제는 앞으로 네가 시간을 두고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겠어? 쉽게 그 답을 얻
을 수 있다면 네가 하는 공부가 아무 의미가
없어지잖아? 안 그래?”
“휴우. 이쪽 세계는 너무 복잡하다는 생각이
들어.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문제가 해
결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복잡하게 얽히기
만 하니.”
우린 말없이 앉아서 창 밖의 세계를 바라보
다가 카페를 나섰다. 윤석을 바래다 주기 위해
서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가다 보니 스물서넛
쯤 된 아가씨가 애완견을 안고 가는 모습이 보
였다. 치와와가 그녀의 가슴에 안긴 채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야, 마쓰다가 기르던 사람고기 맛을 봤던
개들은 어떻게 됐니?”
“아, 그 개들! 모두 사살됐어. 경찰이 개장에
들어가니 사람고기로 판단했는지 달려들더라
는 거야. 하마터면 먹힐 뻔했지. 그리고 수기
에 나왔던 치와와 있지? 그 개는 주인집 아들
의 손가락을 두 개 먹어 치운 뒤 집을 나갔대.
지금쯤 어디서 죽었거나 먹을 만한 사람고기
를 찾아 도쿄 거리를 헤매고 있겠지.”
윤석은 마치‘그 친구 잘 살고 있어’하는 식
으로 감정 없는 어조로 이야기했다.
난 윤석을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다 보니 뜬
금없이 깜깜한 어둠 속에서 기억 하나가 불쑥
솟구쳤다. <카니벌>이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었다.
화면 속에서 꼬마애가 닭다리 같은 것을 맛
있게 갉아먹고 있다. 화면이 클로즈업 된다.
꼬마가 먹고 있는 것은 닭다리가 아닌 할머니
의 손가락.
나는 머리를 저어 의식 한 켠에 달라붙으려
는 기억을 떨궈 버렸다. 다시 한참 걷다 보니
이번에는 불쑥, 요꼬가 죽으면서 피로 썼다는
달 월(月)자가 의미하는 게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떠오를 듯하면서 떠오르지 않았다. 나
는 번화한 거리를 지나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공사장을 지나는데 깜깜한 어둠 속에서 누군
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어둠
속을 한동안 들여다보았다.
퍼뜩 머리를 스치는 게 있었다. 요꼬가 죽으
면서 쓰려고 했던 것은 달 월(月)자 아닌 눈 목
(目)자구나 하는.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여러 가지 생각들
이 스쳐갔다.
요꼬는 죽기 전에‘그 눈’을 본 것일까?
‘그 눈’에 대해서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던
걸까?
만약 밤에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려고 하는
데, 어떤 눈이 나를 쳐다보고 있다면 어떤 생
각이 들까?
전신이 오싹해짐을 느꼈다. 뒤통수에서 누
군가 쳐다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나는 용기를
내서 돌아보았다. 깜깜한 어둠 저편의 세계에
서 누군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난 그 순
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
계와 죽은 자의 세계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
나로 단단히 이어져 있다는 것을.
내가 다시 요꼬의 미완성 글씨인 눈 목(目)
자를 떠올린 것은 윤석과 헤어지고 난 다음날
아침이었다. 신문기사를 뒤적거리던 나는 우
연찮게도 일본발 해외토픽을 발견했다.
식인(食人)을 하던 일본 의대생 체포